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감기는 밥상머리에 내려앉는다’는 속담이 있다. 국립국어원은 ‘밥만 잘 먹으면 감기 정도는 절로 물러간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한국인에게 밥심이란 그렇게 대단하다. 슬픔도 밥심으로 달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요즘 부지런히 밥을 짓는다.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발생한 제주항공 참사 피해자 유족들을 위해서다.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무안군여성농민회 농민들은 참사 소식을 듣자마자 밥을 안쳤다. 밥 200인분에 소고기 시래깃국, 김치, 장아찌, 무나물 등을 만들어 공항에 날랐다. “마음을 모아 주는 방법이었다”고 이들은 말했다. 한국여성농업인 무안군연합회는 떡국 3,000인분을 끓였다. 지역 방앗간을 다 돌아서 산처럼 많은 떡을 구했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안유성 셰프는 김밥 200줄을 말아 공항으로 향했다. 새해 첫날엔 전복죽을 쑤었다. 슬픔에 지친 유족들이 훌훌 넘기기 좋으라고 고른 메뉴다.
□ 밥풀처럼 끈끈한 밥의 연대다. 이용재 푸드칼럼니스트는 “찰기라 일컫는 밥알의 서로 달라붙는 특성은 아밀로펙틴이라는 전분 때문”이라고 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때는 찰기를 이용해 밥을 꽁꽁 뭉친 주먹밥이 있었다. 봉쇄로 생필품이 떨어져갈 때 시장 여성 상인들을 중심으로 집집마다 아껴 뒀던 쌀을 가지고 나와 거리에서 밥을 지었다. 함께 만든 주먹밥을 시민군 트럭에 올려줬다. 광주 오월어머니들은 “추운데 밥 먹고 싸우라”며 윤석열 대통령 탄핵집회에 나온 사람들 손에도 주먹밥을 쥐여줬다.
□ ’가속노화로 가는 음식’이라는 이유로 밥, 특히 흰쌀밥이 괄시받는 세상이 됐다. 통계청의 국내 양곡소비량 조사 결과를 보면, 2023년 1명당 연간 쌀 소비량은 평균 56.4㎏으로 1962년 이 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적었다. 그러나 공동체의 위기가 닥치자 사람들은 밥을 나눠 먹고 슬픔을 나누었다. 비탄에 빠진 이에게 닭가슴살이나 샐러드를 권하진 않는다. 탄수화물이 소화·흡수도 빠르거니와 긴 농경사회를 거치며 유전자에 새겨진 쌀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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