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미국-바티칸 수교
1984년 1월 10일 미국과 바티칸시국이 공식 수교했다. 1867년 2월 미 의회가 바티칸 주재 외교 공관에 대한 일체의 자금 지원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한 지 117년 만이었다.
건국 이래 줄곧 바티칸과 영사 관계를 유지해오던 미국이 인연을 끊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 사건이었다. 범인이 남부연합군 출신 가톨릭 교인 존 윌크스 부스 일당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스 일당의 암살 동기는 남북전쟁 패전과 해방 노예에게 공민권을 부여한 데 대한 분노였지만, 분열의 심화를 우려한 연방 정부는 그들이 이교도라는 점을 부각했다. 박해를 피해 바다를 건너온 청교도의 후예라는 종교적 일체감을 위해 가톨릭에 대한 해묵은 원한을 이용한 셈이었다. 로마 주재 미국 영사가 매주 자기 집에서 열던 개신교 예배를 교황청이 금지했다는 헛소문(거짓 뉴스)이 유포되기도 했다. 그 결과가 1867년 법이었다.
1978년 교황이 된 요한 바오로 2세는 맹렬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착좌 이듬해인 79년 고국 폴란드를 방문해 레흐 바웬사의 반정부 노동운동을 공개 지지하며 인간 존엄을 위해 (공산주의의) 압제에 맞서라고 촉구했다. 80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에게 교황은 냉전의 좋은 우군이었다. 반공주의자 바오로 2세의 인권과 존엄에는 미국이 CIA를 앞세워 중남미에서 자행한 만행에 희생된 이들의 인권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그는 해방신학을 공식 단죄하기도 했다.
1534년 헨리 8세의 수장령으로 교황청과 관계를 끊었던 영국도 448년 만인 1982년 교황청과 외교관계를 회복했다. 미국-바티칸 수교에 개신교-유대교 진영 및 일부 반종교 시민단체가 반발했다. 수정헌법 1조(정교분리 및 종교 자유)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연방 정부는 당시 세계 106개국이 바티칸과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은 사실을 언급하며 미국은 가톨릭 교회가 아니라 바티칸시국과 수교한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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