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분야 여야정 향한 쓴소리 빗발
부처 간 이견 조율 못해 동력 떨어져
전력수급기본계획 국회 보고 못하고
'햇살론' 예산 삭감에 저신용자 절망
교육·노동·연금·의료 개혁도 헛바퀴
윤석열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을 거부하면서 정국 혼란이 커진 가운데 정부의 주요 정책들도 표류하고 있다. 정책 추진을 책임진 공직 사회는 정세만 바라보며 손놓고 있는 모양새다. 하지만 헛도는 정책 중 우리 사회의 구조를 바꾸기 위한 과제나 민생과 직결된 사업도 많아 마냥 방치하기는 어렵다. 과도기적 체제의 공백을 메우려면 여야정이 국정 협의체를 조속히 재개해 급한 정책과 입법 과제부터 처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책 조정 기능 실종... 움직이지 않는 공직 사회
우선 윤석열 정부의 핵심 과제였던 '4+1 개혁(교육·노동·연금·의료 개혁, 저출생 대책)'부터 멈춰섰다. 대부분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공직 사회도 이전만큼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특히 정부 부처 간 이견을 조율하는 국무조정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예컨대 당초 지난달 말 발표 예정이던 의료개혁 과제 중 하나인 실손보험·비급여 개편이 그렇다. 보험사를 담당하는 금융위원회는 실손보험 보장성을 대폭 축소하는 강도 높은 제도 정비를 바라지만 의료계 입장을 고려해야 하는 보건복지부는 그보다는 온건한 개편에 힘을 싣는 것으로 전해졌다. 예전 같으면 국무총리가 방향타를 쥐고 양 부처 간 입장차를 조정했겠지만 지금은 어렵다.
정부가 국회를 설득해 동의를 이끌어 내야 하는 정책과제들도 공전하고 있다. 연금개혁은 지난해 9월 정부가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42% △출생 연도별 보험료율 인상 속도 차등화 등 개혁안을 제시한 후 뚜렷한 진척이 없다. 조기 대선이 현실화하면 ‘표 떨어지는’ 연금개혁은 더 뒤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주은선 경기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연금 개혁은 2030 세대를 위해 필요한 대책인 만큼 꼭 추진해야 한다"며 "시국 상황 등과 관계없이 우리 사회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라고 말했다.
교육 정책도 좌초했다. 올해 1학기부터 전국 초중고교에서 활용하려던 인공지능(AI)디지털교과서는 ‘교과서’에서 ‘참고서(교육자료)’로 그 지위가 격하됐다. 더불어민주당이 “학교 현장이 준비를 마치지 않았는데 정부가 무리하게 도입하려고 한다”며 법을 고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노동 정책이 멈춰선 건 정권의 권위가 무너진 탓이 크다. 예컨대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중심으로 논의됐던 정년연장 논의는 노동계 대표인 한국노총이 12·3 불법 계엄 이후 대화 창구에서 이탈하면서 사실상 중단됐다.
그나마 성과를 낸 건 의대 증원 정도다. 2025학년도 대입에서 전년보다 약 1,500명 많은 4,610명(정원 외 포함)을 뽑기로 해 현재 정시모집이 진행 중이다. 다만, 의료개혁 과제 중 올해 4월 또는 6월 발표하려 했던 미용성형시장 규제 방안 논의는 중단될 가능성이 있다. 의료개혁특별위원회에 참여했던 병원단체들이 계엄 사태 이후 탈퇴한 탓이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부 교수는 “의료개혁은 국민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이고 사회적 지지도 높은 만큼 정치 상황과 관계없이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력수급계획 확정 못해... 수요 감당 못할 판"
경제·산업 분야 정책들은 국회에서 멈춰섰다. 재계는 '골든 타임'을 놓쳐선 안 된다며 의견 대립이 없는 무쟁점 법안부터 국회가 통과시켜달라고 요구한다. 산업 패러다임의 전환과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우리 기업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여건을 서둘러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산업계가 국회 통과를 바라는 주요 법안은 △반도체 산업 지원 강화 법안 △국가 기간 전력망 적기 건설을 위한 지원 체계 구축안 △해상 풍력 계획 입지 및 산업 육성 지원안 등이다.
재계는 반도체특별법안에서 여야 간 이견이 큰 '주 52시간 근로제 적용 예외' 조항을 빼고라도 통과를 원한다는 입장이다. 그만큼 반도체 산업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미국, 중국 등과 국가 대항전 수준의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한국은 직접 보조금 없이 일본의 10분 1 수준의 세액 공제만 주고 있는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요구다. 이수원 대한상의 기업정책팀장은 “반도체 산업은 범용 제품이 중국에 잠식당하고 있어 첨단 산업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정부 지원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에너지 관련 정책 역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이 대표적이다. 정부가 마련한 이 안에는 2024~2038년까지 원자력, 석탄, 신재생에너지 등 전원별 수급 비중이 담겼다. 산업부는 늦어도 지난해까지 이를 국회 상임위원회에 보고한 뒤 절차를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12·3 불법 계엄 이후 정치권이 탄핵 논의에 집중하느라 지난달 19일 이후 상임위가 열리지 않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전기본 확정이 늦어지면) 발전 설비가 제때 마련되지 못해 2030년대 초반 전력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당장 시급한 민생 경제 대책도 암초에 걸렸다. 실제로 서민금융진흥원의 정책금융상품인 햇살론15는 직격탄을 맞았다. 개인신용평점이 하위 20%인 최저신용자를 지원하는 정책금융상품이다. 당초 금융위는 올해 햇살론15의 공급 목표를 1조500억 원으로 잡았지만 예산 삭감 여파로 40% 줄어든 6,500억 원 수준에 그칠 전망이다.
꽉 막힌 관가 인사, 떨어진 정책 추진 동력
공직 사회가 정책 추진에 이전보다 적극적이지 않은 건 '조기 대선' 가능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기 대선이 현실화한다면 기존 정책 방향을 수정하거나 아예 새판을 짜야 할 수 있다. 관가 안팎에서는 일부 공무원이 각 정당이 과거 선거 때 내놨던 정책 공약을 두고 '예습'하고 있다는 얘기가 돈다. 또 고위 공무원들의 승진이 지연되는 등 '인사 동맥경화' 현상 탓에 정책 추진 동력은 더 떨어졌다.
하지만 정치 상황과 무관한 민생·개혁 과제는 정부와 여야가 힘을 합쳐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여야가 초당적으로 협력하는 국정 협의체의 역할이 절실하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지난달 31일 국정 협의체를 운영하기로 합의했고 이번 주 중 실무 협의에 나설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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