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사수대'로 나선 여당 중진들
국회 계엄 해제 표결에는 정작 불참
헌정 수호보다 안위 챙긴 민낯 보여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 시도가 예상됐던 지난 6일 한남동 관저 앞. 동이 트기 전부터 44명의 국민의힘 의원이 모여들었다. 수사기관의 법 집행을 육탄 저지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108명 여당 의원의 40%를 넘은 셈이다. 이 중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표결에 참석한 이는 '전(前) 친한동훈계' 장동혁 의원 1명뿐. 개별 헌법기관으로서 헌정질서 회복엔 나 몰라라 하다가 강성 지지층 눈치만 살피며 윤석열 사수대로 나선 것은 한국의 보수가 처한 역설을 상징한다.
5선 중진 중에 지도부 투톱인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과 권성동 원내대표를 제외하면 4명(김기현 나경원 윤상현 조배숙 의원) 전원이 관저 앞에 나타났다. 김기현 의원은 탄핵 반대 시위대를 향해 "정말 송구하고 감사하기 짝이 없다"고 했고, 나경원 의원은 "대한민국 법치와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나왔다"고 했다. 윤상현 의원은 지난달 전광훈 목사가 주최한 극우 집회에서 사죄의 큰절을 하며 "성스러운 전쟁"을 외친 데 이어 이날은 관저 안까지 들어갔다. 법치 수호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는 보수 중진의 발언이라고 하기엔 아연할 수준이다.
이들은 대변인부터 당대표,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 주요 당직을 거치며 '보수 엘리트'로 성장해왔다. 보수 위기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당과 민심의 균형을 잡아줘야 할 판에 강성 지지층을 향해 구애 경쟁에 나선 것이다. 의원들의 집단 행동에 눈감고 있는 친윤 지도부도 다르지 않다. 윤 대통령의 국헌 문란에 대한 사회·정치적 평가는 이미 끝났다. 그럼에도 구차한 거짓말과 궤변으로 국론 분열을 선동하는 대통령을 옹호하는 모습은 초라해 보였다.
이들이 재선일 무렵인 2008년 4월 18대 총선 전후로 시간을 돌려보자. 당시 보수 위상은 지금과 달랐다. 2007년 12월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후보의 압승에 따른 후광 효과로 총선 전 한나라당이 200석 이상을 차지할 것이란 예상이 나왔다. 한나라당은 과반인 153석에 그쳤으나, 친박연대와 보수성향 무소속, 자유선진당을 포함하면 보수 진영은 204석에 달했다. 통합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은 81석에 그쳤다. "한국판 자민당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1987년 민주화 이후 보수 진영이 세를 가장 넓힌 시기였다.
그러나 이후 네 차례 총선을 거치며 국민의힘은 108석으로 쪼그라들었다. 개혁신당을 합해도 보수 진영은 111석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민주당은 조국혁신당(12석)을 제외하고도 175석의 다수당이 됐다. 국민의힘은 2012년 대선까진 박근혜 후보를 앞세워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배신자 프레임'을 앞세운 친박 주도의 뺄셈 정치를 거듭하다 2016년 총선에선 패했고 국정농단 사태까지 터지며 지지 기반이 붕괴됐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김종인 비대위와 이준석 대표 체제가 청년 남성, 호남을 겨냥한 외연 확장을 시도했지만, 윤 대통령 당선 이후 친윤에 의해 축출되면서 올스톱됐다.
이러한 과정을 겪은 중진들에겐 평균 민심보다 자신의 생존이 지상과제일 것이다. 비상계엄을 위헌으로 규정하고 민심에 호응해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 한동훈 전 대표를 내쫓는 데 동조한 이유다. 국민 눈높이와 거리가 있더라도 윤 대통령을 옹호하는 강성 지지층의 눈밖에 나지 않아야만 차기 공천과 지도부 입성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헌정 수호나 보수 재건보다 자신의 안위부터 챙기는 모습에서 민주주의에 무지한 윤 대통령과 정치 경륜을 20년 가까이 갖췄다는 보수 중진의 얼굴이 포개진다. 그래서 계엄·내란 동조 세력이라고 하는 것이니 억울하다고 느낄 이유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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