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변곡점, 경쟁력 상실, 인력 부족
위기지만 부가가치 높이면 시장 열려
방향 잘 잡고 온디바이스 AI 해 볼만
직업 안정성으로 이공계 기피 풀어야
편집자주
다양한 경제, 산업 현장의 이슈와 숨겨진 이면을 조명합니다.
반도체 수출이 지난해 1,419억 달러(약 210조 원)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전체 수출에서 차지한 비중은 20%도 넘었다. 그러나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삼성전자가 인공지능(AI) 시대에 대응하지 못하며 주가가 급락한 충격이 컸다. 반면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NVIDIA)의 시총은 어느새 삼성전자의 15배가 됐다.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도 1위 대만 TSMC와의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 그사이 중국 업체들은 턱밑까지 추격해 왔다. 보조금을 기대하고 늘린 대미 투자도 트럼프 리스크가 커진 상황이다. 정치까지 혼란스럽자 일각에선 '코리아피크'(한국 경제가 정점을 찍고 꺾이기 시작했다는 주장)를 우려한다. 이런 위기 공감대가 형성되며 한국공학한림원은 지난해 초 반도체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회장인 김기남 삼성전자 고문을 중심으로 곽노정 SK하이닉스대표와 이혁재 서울대 교수가 공동위원장을 맡고 안현 SK하이닉스 개발총괄 사장, 이현덕 원익 부회장, 박재홍(보스반도체) 조명현(세미파이브) 대표,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 권석준(성균관대) 김동순(세종대) 백광현(중앙대) 교수 등이 매달 머리를 맞댔다. 특위를 이끈 이 교수는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이기도 하다. 1985년 대통령령으로 설립된 연구소는 K반도체의 요람이다. 반도체 인력 교육은 물론 각종 장비를 갖춰 연구자나 학생, 벤처기업에서 신청하면 누구나 이용할 수도 있다. 지난달 말 반도체공동연구소로 이 교수를 찾아가 K반도체의 미래를 물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위기인가, 삼성전자의 위기인가.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잘하고 있는데.
“전반적으로 K반도체의 위기라고 볼 수 있다. 삼성전자도 SK하이닉스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크게 세 가지 위기가 겹쳤다. 먼저 기술이 변곡점에 달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메모리 반도체 기술에서 초격차를 유지했다. 그런데 어느새 중국이 바짝 따라왔다. 격차를 벌리고 싶지만 기술적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후공정 패키지가 중요해지면서 기술 패러다임도 바뀌고 있다. 원래 패러다임이 전환될 때가 위험하다. 휴대폰에서 스마트폰으로, 아날로그TV에서 디지털TV로 바뀔 때 우린 노키아와 소니를 따라잡았다. 그런데 이번엔 그동안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우리가 따라잡힐 상황이다. 둘째, 선도적인 투자 경쟁력도 잃어가고 있다. 우리 기업들의 성공 비결 중 하나가 과감한 투자였다. 사실 다른 나라들은 거의 반도체 투자를 안 했었다. 이젠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 전 세계가 반도체 투자에 뛰어들고 있다. AI 시대를 맞아 반도체가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전략 자산이 됐기 때문이다. 셋째, 인재들이 말라가고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진 우수 인재들이 이공계로 많이 왔다. 그러나 97년 외환위기 이후 30년 가까이 이공계 기피 현상이 누적됐다. 지금까진 그 전에 들어온 인재들이 산업 현장을 지키며 버틸 수 있었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더구나 전 세계적인 인력 확보 경쟁 속에 인재 유출 또한 심각하다.”
- 삼성전자가 예전 같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삼성전자의 위기는 잠시 지나가는 위기라고 생각한다. 삼성전자는 오랫동안 자기 방식대로 성공해 왔다. 이번엔 삼성전자 방식이 틀리고 하이닉스 방식이 맞았지만, 사실 누구도 HBM이 이렇게 뜰 것으로 판단하긴 힘들었다. 오픈AI가 갑자기 챗GPT를 내놓고, 또 챗GPT가 이렇게 많은 메모리를 쓸 것으로 예상한 이는 거의 없다. 나도 챗GPT가 나왔을 때 깜짝 놀랐다. 알파고도 충격이었지만 챗GPT처럼 단기간 내 산업계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삼성전자도 당황스럽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극복할 것이다. 사실 인텔도 2000년대 초 비슷한 일을 겪었다. 당시 인텔과 AMD는 중앙처리장치(CPU) 속도 경쟁을 벌였다. 그런데 만년 2위였던 AMD가 인텔보다 먼저 1기가헤르츠(GHz) CPU를 개발하는 데 성공, 파란을 일으켰다. 인텔에선 AMD가 만든 CPU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며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할 정도였다. 그러나 곧바로 고속 CPU 개발에 나서 3, 4년 후 AMD를 따라잡고 이후 10년 이상 시장을 더 주도했다. 자금도 많고 인력도 우수한 삼성전자는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 다만 과거엔 문제가 있어도 빨리빨리 따라잡곤 했다. 스마트폰도 애플이 먼저 만들었지만 삼성이 갤럭시로 금방 추격했다. 그런데 이번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다. 어쨌든 국가 차원에서 보면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갈 것이다. 중요한 건 이제 메모리 시장만 보면 안 된다는 데 있다.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방향을 잘 잡고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잘 하면 다 가질 수도 있지만 자칫 모두 잃을 수도 있는 중요한 시기다.”
-어떻게 하면 다 가질 수 있나.
“메모리 반도체는 우리가 1등이란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파운드리도 TSMC한테 밀리긴 하지만 5나노 이하 최첨단 초미세 공정이 가능한 곳은 전 세계에서 삼성전자와 TSMC 두 곳밖에 없다. 특히 지금은 AI 시대다. 큰 패러다임 변화다. AI로 인해 메모리가 중요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메모리 반도체를 잘하는 만큼 메모리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메모리를 바탕으로 비메모리까지 합쳐 새로운 반도체를 만들면 기회가 열릴 수 있다. 이걸 잘하면 시장을 다 차지할 수 있다. AI 시대에 맞는 메모리를 잘 만드는 게 관건이다. 앞으론 메모리와 CPU가 따로 구동되는 게 아니라 그 사이가 좁아질 수 있다. 아예 메모리 안에 CPU를 집어넣는 프로세서인메모리(PIM) 반도체도 개발되고 있다. PIM뿐 아니라 HBM 맨 밑단(베이스 다이)에 로직 반도체를 집어넣는 방식도 있다. 그래픽처리장치(GPU)의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 반대로 GPU나 CPU 밑단에 메모리를 붙일 수도 있다. 대용량 메모리를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싼 CPU나 GPU가 이를 공용하는 방법도 있다. 여러 새로운 형태의 컴퓨팅 방법과 하드웨어 구조가 논의되고 있고 업체들도 서로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고 있다. 반도체 기술의 패러다임 전환기이고 격변기다. 잘 헤쳐나가야 한다.”
-지금 K반도체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우수 인력 양성과 확보다. 반도체 개발은 어떤 문제가 발견됐을 때 해결하지 못하면 진도를 더 나갈 수 없다. 파운드리 수율 문제만 해도 대만은 문제를 풀 수 있는 엔지니어가 있는데 우린 없으니 뒤처지는 것이다. 인력의 질과 동기 부여가 관건이다. 사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수출 비중이 가장 큰 게 반도체인데도 서울대엔 반도체학과도 없다. 첨단융합학부 안에 5개 전공 중 1개일 뿐이다. 반도체 전공 교수도 서울대는 국립대만대의 절반도 안 된다. 더구나 대만은 '신남양정책'으로 동남아 인재까지 유치하고 있다. 이렇게 대만은 나라 전체가 반도체 총력전이다. 미국은 실리콘 밸리로 전 세계 인력이 다 모이니 걱정이 없다. 중국도 대졸자만 연간 1,000만 명 아닌가.”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무서운 속도다. 미국의 제재가 효과가 없는 건가.
“만약 미국이 제재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벌써 중국에 따라잡혔을 수도 있다.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줬다. 그런데도 이미 시스템반도체는 중국이 우리보다 더 잘한다. 반도체 설계도 우릴 넘어섰다. 중국엔 팹리스(fabless·반도체 설계를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가 많다. 화웨이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도 모두 중국에서 직접 설계하고 생산한다. 자국 시장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게 가능했다.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인 SMIC도 7나노 공정으로 양산하고 있다. 7나노 미만의 초미세 공정은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가 없어 쉽지 않겠지만 범용(레거시) 공정은 이미 잘하고 있다는 얘기다. 중국은 반도체 장비도 자체 개발하고 있다. 수준은 낮아도 탄탄한 반도체 생태계가 구축된 셈이다.”
-한국에선 엔비디아 같은 기업이 나올 수 없나.
“엔비디아 생태계의 핵심은 쿠다(CUDA) 소프트웨어다. AI 프로그램 개발자가 엔비디아 GPU를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데, 이미 2006년에 나왔다. 일찌감치 멀리 보고 개발한 셈이다. 시스템반도체 분야의 경우 우린 시장이 작다. 따라서 정부가 초기 수요를 창출해 줄 필요가 있다. 엔비디아 창업자인 젠슨 황 같은 인재가 나오려면 비슷한 부류의 인재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이러한 인재가 많아야 그중에서 성공도 실패도 나오는 법이다. 우린 그런 여건이 안 됐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도 AI 칩을 만들겠다고 하는데.
“다른 곳과 똑같은 출발점이지 않을까 싶다. 관건은 수요처가 있어야 하는데, 아마존이나 구글 모두 직접 AI 칩을 만든다. 지금은 엔비디아를 선호해도 나중엔 아마존이나 구글에서 만든 AI 칩으로 구동시킬 수 있다. 오픈AI도 직접 칩을 만들어 돌리면 엔비디아를 안 쓸 수 있다. 빅테크의 행보를 주시해야 한다. 과연 수익 모델이 가능한지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비즈니스가 가능한 수준의 AI는 우리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만큼 기회가 있다. 특히 클라우드 서버 쪽 AI는 엔비디아가 강하지만 사용자 기기 안에서 AI 연산을 직접 처리하는 온디바이스 AI 분야에선 아직 기회가 많다. 국내 기업 중에서도 퓨리오사AI, 리벨리온 등 후보군이 있다. 제2의 엔비디아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하다. 반도체 분야로 우수 인력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방안은.
“그동안 삼성전자는 초격차의 세계 1등이니 스스로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목표는 뚜렷했다. 메모리 용량을 늘리고 속도를 더 빠르게 하면 됐다. 이를 향해 달려가는 건 산업계가 학교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이번 AI 혁명은 아예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목표가 정해진 게 없어 이렇게 갈 수도, 저렇게 갈 수도 있다. 방향을 정하는 게 중요하다. 산업계는 그런 경험이 많지 않았다. 지금까진 앞만 보고 달려왔다면 이젠 새 방향을 정하고 새 시장을 만들어내야 한다. 산학협력이 중요한 이유다. 사실 미국이 이런 시스템이다. 미국은 학교에서 벤처가 많이 나온다. 우리나라도 한 단계 더 성장하려면 산학협력이 활발해야 한다. 학계도 산업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아야 한다. 이를 긴밀하게 연결하는 현실적 방법은 산업 현장에 오래 계셨던 분들이 퇴임 후 학교로 와 교수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50대 초중반 분들이 학교로 오면 10년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 지금은 전임이 어려워 2년 계약직이 많다. 정부에서 이런 산학협력 교수에게 과제를 주거나 지원을 해 주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다. 자연스레 이공계 기피를 줄이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반도체를 전공하면 65세까지 회사와 학교에서 일할 수 있다는 건 큰 매력이 될 것이다. 의사랑 비교했을 때 직업 안정성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의대 증원보다 더 급한 게 이공계, 특히 반도체 인력 양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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