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3.3
‘최초의 아나키스트’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은 18세기 유럽의 여러 ‘불순한’사상가들 중에서도 특히 뾰족한 정치철학자였다. 그의 급진성은 ‘차분한 토론(calm discussion)’만이 세상의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 여겨 모든 폭력적 접근을 거부한 데서, 역설적으로 도드라졌다.
고드윈은 이성적ㆍ감성적 인간의 능력, 다시 말해 자유로운 개인의 자율적ㆍ자발적 선택의 미덕과 가능성을 무한히 신뢰했고, 당연히 그것들을 억압하고 규제하고 제약하는 모든 것들- 국가와 제도와 관습의 권위를 비타협적으로 부정했다. 그에게 정부는 “인류의 악덕을 촉발하는 항구적인 원인”일 뿐이어서 “완전히 없애는 방법 외에는 억제가 불가능한 악”이었다.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행동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조건이라 여겼고, 그런 면에서 비밀투표조차 “스스로의 결단과 행동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당당히 맞서야 할 책임감을 쇠퇴시키고 본래 의도를 감춘 위선과 기만을 독려”하는 “자유가 아닌 노예의 상징”일 뿐이었다. 결혼제도를 두고도 “결혼은 용기가 아니라 비겁함의 소치이며, 공적보다는 그 이외의 것을 내세워 사랑과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개인의 가장 고귀한 특권은 “각자 독립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며 무절제한 열정이나 이웃의 독단적 선동에 이끌리지 않고 올바른 분별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독재”라 여겨, 모든 폭력과 강압적 대화를 배격했다. 그에게는 국가의 이념이, 법이, 모든 제도와 관습이 모두 광의의 ‘독재’였다. 그가 성장한 비국교도 집안의 분위기, 즉 종교적 문제에 대한 국가의 간섭에 대한 반발심이 사상의 기저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결혼 제도에 냉소하긴 했지만 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아내가 작가 겸 여성해방운동가 울스턴 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였고, 부부가 낳은 딸이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셀리(Mary Shelley)였다. 19세기 이후의 모든 폭력ㆍ비폭력 저항운동의 사상적ㆍ철학적 토대를 제공한 윌리엄 고드윈이 1756년 3월 3일 태어났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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