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를 만들거나 강연을 기획할 때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신식씨, 우리 장기적인 약속은 아직 하지 맙시다.” 나는 섭외하고 싶은 사람에게 의욕을 전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의욕을 누그러뜨린다.
방어적 비관주의. 심리학 에세이에 자주 나오는 개념이다. 문화판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명하는 데도 이 개념을 적용해볼 수 있을 듯하다. 만사가 그렇지만,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둠을 의식적으로 표해야 덜 다치리란 마음. 문화판 내부에서는 더욱 짙어져 간다. 무엇을 해보자고 모인 자리. 나누는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흥미가 차오른다. 허나 다들 알고 있다. 누군가가 이 흥미의 열기를 부러 낮춰야 함을. 마침 한 사람이 입을 연다. 미래를 생각하며 들떠 있던 사람들은 이내 착잡해진다. 그리곤 입을 연 사람을 보며 문화판에서의 연식과 경험치를 가늠한다. ‘저분도 이래저래 제법 데였군’ 하고.
방어적 비관주의가 심해지면, 문화판 사람들의 재치는 툴툴거림의 대상이 된다. 나도 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찾아오는 사람이 지켜야 하는 재미난 규칙, 철학서·시집 속 글귀, ‘이곳은 손님이 직접 안주를 해 드시는 곳입니다’ 같은 안내문까지 벽에 적힌 가게에 들어가면 뾰로통해지니 말이다. 그리곤 습관적으로 짐작한다. ‘또 어느 작가가, 가수가, 문화평론가가 가게를 차리셨나.’
문화판이란 세계. 이곳에선 오늘도 재기발랄한 출판물 창간, 튀는 아이디어를 내건 공연·강연·전시회 개최, 특색 있는 (북)카페와 술집, 서점 창업, 프로젝트팀 결성까지 그 결과물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중이다. 이와 동시에 과연 얼마나 갈지, 그 우려 또한 재기발랄해졌다. 문화판을 논할 땐 으레 정부와 시민단체가 함께하는 정책 대안이 당위적으로 제시되곤 했다. 여기선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것은 기획·기획자에 대한 지나친 환상과 포장이다.
문화판에서는 소위 ‘똘끼’가 어느 영역보다 중시된다. 여기선 평소 익살과 재담 가득한 사람도, 과묵한 사람도 자신 안의 똘끼를 확인하고 이를 상품화하고자 실험한다. 똘끼란 단순히 내 안에 억눌려 있던 엉뚱한 생각을 표하는 행동이 아니다. 똘끼에도 나름 등급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똘끼가 마냥 천방지축 내지르는 생각이 아님을 보장하는 것 중 하나는 기획자의 뛰어난 독서력과 여행력이다. 문화판은 독서력과 여행력을 바탕으로, 그것을 상업적으로 전환해보면 어떻겠냐는 사람들의 말에 솔깃해하는 습성이 있다. 몇 년간 득세한 표현을 빌리자면, ‘인문기획과 마케팅’ 같은 게 흥한다.
허나 이 바닥에 있을수록 그러한 기획자의 지적 자산, 기존의 진부함과 거리를 두었다는 콘셉트만큼 중요한 게 있다고 매번 느낀다. 기획을 지속적으로 끌고 갈 동반자를 향한 인식이다. 기획자의 빛나는 성공기. 그 기록엔 디자이너, 제작사 등 실질적 수행자들에 대한 상찬이 있다. 하지만 이는 기획자 자신의 인품과 센스를 미화하는 데 동원되는 소재일 뿐이다. 정작 그들은 현장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한다. 기획을 짜는 일만 ‘감각’이고, 예산을 짜고 집행하는 일은 ‘돈줄’이란 이분법도 아직까지 굳건하다. 그러다 보니 문화판의 체격은 다부져 보이나 체력은 더욱더 부실해져 간다.
다시 근본적인 물음을 꺼낸다. 문화판에서 과연 ‘좋은 사람’은 누구일까. ‘좋음’은 대체 무엇일까. 개인의 훈훈한 품성과 아량을 논하려는 게 아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자존감을 존중하고, 충분한 대가를 제때 챙기려고 애를 쓰는 마음. 그 마음을 신뢰의 구조로 정착시키는 노력을 강조해본다. 이 노력을 진부함과 새삼스러움이라는 굴레에 방치해둔다면, “오래 가길 바랍니다”, “이제 자리 잡히는 것 같네요” 같은 문화판 사람들의 응원은 시작 단계부터 끝을 예감하는 피로감 섞인 인사로 계속 읽힐 수밖에 없다.
김신식 감정사회학도·‘말과활’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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