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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메리칸 스타일

입력
2015.08.0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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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좋아해요?” 털 복숭이 백인의 우리말에 깜짝 놀랐다. 서울 동대문 밖에 있는 관우의 사당, 그러니까 중국의 삼국시대 촉한의 명장 관우를 모신 동묘에서의 일이다. 그때 나는 동아시아 최고의 인기소설인 ‘삼국지’가 중국에서 어떻게 그림으로 그려졌는지 그리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어떤 변화상을 보였는지를 조사하고 있었다. 동일한 문학작품을 그린 그림이 민족과 국가, 시대를 달리하여 어떻게 변하였는가가 당시 나의 관심이었다.

관우는 ‘삼국지’의 주인공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영웅의 한 명으로 중국 사람들의 열광적인 관우 신앙은 현재도 진행 중이고 우리나라에서도 관우를 모신 성제교가 근대까지 번성했다. 임진왜란 때에 조선에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의 요청에 의해 지어진 동묘는 건축물의 배치와 형태에서 석물까지 모두 중국식으로 되어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동묘의 여러 곳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노랑머리에 푸른 눈의 서양인이 나를 유심히 보고 있었나 보다.

그 친구의 큰 목소리에 잠시 당황했지만 우리는 곧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왜 동묘를 조사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관우는 어떤 존재로 인식되었는지 등에서 시시콜콜한 개인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대화가 오갔다. 그는 미국인이었고 미국 한국학의 태두라 일컬어지는 워싱턴대학의 제임스 팔레 교수의 제자였다. 한국근대사를 전공하는 그는 특히 한국과 중국의 외교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동묘에 걸려있는 크고 작은 현판 글씨는 중국의 유력한 정치가들의 것으로서 근대 한중 교류사의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에 종종 들러 살펴보고 있다고 했다. 미술사 전공자인지라 그 방면에까지 관심이 미치지 못했던 내게 그의 말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섬돌에 나란히 앉아 한참 얘기한 뒤 전화번호를 교환하며 우리 모임에 초청하자 그는 선한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수락했다.

얼마 뒤 시ㆍ서ㆍ화ㆍ술ㆍ친구를 좋아한다는 의미인 벽오사라는 이름의 우리 모임에 그미국 친구도 함께했다. 공부는 서울의 한 대학에서 하고 있지만 춘천에 산다는 그는 햇살이 내리쬐는 소양강변을 자전거로 달리는 기분을 아느냐고 물으며 한국 사람들은 왜 복잡한 서울에만 몰려 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말이 잘 늘지 않는다며 쑥스러워 하기도 했는데, 우리는 우리말 잘 못한다고 민망해하는 서양인은 처음이라며 웃었다.

그의 아이디가 ‘섬놈(sumnom)’이어서 어떤 의미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미국 동부의 작은 섬에서 태어나서 그랬다고 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학교를 옮겨 다니며 사학 미술사 예술철학 등 한국학의 여러 분야를 공부한 내 얘기를 듣더니 ‘아메리칸 스타일’이라고 반가워했다. 미국에서는 학교나 전공을 바꾸는 일이 흠결은 커녕 플러스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자신도 대학은 미국의 동부에서 다니고 석사는 남부, 박사는 서부에서 하고 있는데 전공이 조금씩 다르고 지금은 한국에서 관우 사당을 조사하다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며 껄껄 웃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당연한 이른바 순혈주의라는 것은 미국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몇몇 학교 출신이 독식하는 학회, 대학에서도 볼 수 있는 향우회 등 우리나라의 현상이 재미있고 신기하다고 덧붙였다.

줄곧 국내에서 한국학 분야를 전공한 토종인 내가 본의 아니게 아메리칸 스타일이 된 셈인데 그의 말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일이 외부의 눈에는 신기해 보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혈연ㆍ지연ㆍ학연 등으로 꽁꽁 묶여 있는 우리의 현실을 미국인 ‘섬놈’이 정확하게 집어냈기 때문이다. 섬놈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더 듣고 싶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우리 허물을 들춰보는 데에 외국인의 눈을 빌리는 것이 그다지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나는 아직 민족주의자인가 보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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