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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복면시위왕, 그런 거 없다

입력
2015.11.25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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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시위를 막기 위한 일명 ‘복면 금지법’ 발의까지 나오면서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단지 얼굴을 가렸다는 이유로 시위대와 IS를 비유한 것은 1차원적이다 못해 실패한 은유인데, 맥락이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시위에서의 복면은 초상권을 보호하고 캡사이신을 막을 최소한의 장치이다. 시민에게는 방패도 무장도 없다. 이를 ‘복면 뒤에 숨어 폭력을 조장하고 시민을 선동하는 배후세력’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그 자리에 모인 시민들의 다양한 목적과 정치적 신념을 모조리 부정하고 가상의 적(이를테면 복면시위왕?)과 섀도 복싱하는 꼴이다.

복면 금지법의 목적은 ‘복면 뒤에 숨은 폭력 시위대 척결’이라고 한다. 이때의 ‘폭력’은 가장 보편적인 의미로, 때리고 부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더 큰 폭력을 행사한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무장하고, 결정이 덜 녹은 캡사이신을 뿌려대며, 구급차에까지 물대포를 들이댄 쪽이다. 하지만 민중 총궐기 다음날 언론은 부서진 경찰차 등의 스펙터클을 이용해서 시위대가 저지른 ‘폭력’의 참상을 편파적으로 보도했고(심지어 해당 경찰차는 시위대 때문에 파손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초점은 ‘왜 민중 총궐기가 일어났는가’라는 메인 이슈를 이탈하고 있다. 이야기되는 것은 오직 시위대의 폭력성뿐이다. 하지만 미국처럼 경찰차에 불을 지르거나 영국처럼 탱크를 끌고 나오는 류의 폭력을 넘어서, ‘폭력’이라는 개념을 좀 더 확장하여 사용할 때, ‘모든 시위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다.

스무 살 때 처음 입성한 서울은 ‘달콤한 나의 도시’가 되기에는 너무 살벌한 곳이었다.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커다랗고 배고픈 도시 곳곳에서 불쑥불쑥 농성장과 시위대가 출현했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재능교육 농성장의 텐트를 처음 보았을 때이다. 나는 그제야 어릴 때부터 무수한 숨바꼭질을 해왔던 가정방문 학습지 교사의 가혹한 노동 조건과 실태를 인지하고, 돌아보게 되었다. 가시화는 그런 것이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음으로써 은폐되었던 것들을 불러내는 작업은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전까지의 안락한 세계에 타격을 가하고, 말할 수 없던 자들이 말하고, 기존의 방식을 일그러뜨리기 때문이다.

지난 14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집회 현장.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지난 14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집회 현장.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는 법을 ‘법을 정립시키는 폭력’과 ‘법을 유지하는 폭력’ 또는 ‘헌법 수여 폭력’과 ‘헌법’으로 구분했다. 벤야민은 이를 바탕으로 ‘법을 폐기하는 폭력’ 또는 ‘신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추가한다. 법은 사실상 그것을 유지하는 경찰과 군대의 폭력과 늘 혼합되어 뒤엉켜 있는데, 벤야민은 이러한 법의 자기 정당화 기제를 신화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법은 ‘신화적 폭력’이다. 시위대를 도로로 내몰고, 4분 동안 도로교통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하는 것이 이러한 신화적 폭력에 해당한다. 지젝은 기존의 권력 관계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신적 폭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것은 체계적 폭력에 대응하는 대중들의 폭력적인 자기 방어고, 기존의 법과 윤리를 중지시키는 해방적 기능을 수행한다. 시위나 농성 같은 행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물론 ‘복면 시위대’에 대한 탄압은 바로 이렇게 법치 질서가 무력화될 것이라는 공포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시민들의 기본권을 빼앗으면서까지 유지되어야 할 법은 어디에도 없음을, 신분제 폐지나 인종 차별 운동, 동성동본 혼인 금지 폐지, 여성 투표권 투쟁 등 많은 선례가 입증한다. 그것들은 언제나 그 당시에 ‘너무 폭력적’인 의제였으며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복면을 금지해 폭력 시위를 막겠다는 것은 결국 초상권을 박탈하고 최소한의 방어조차 봉쇄함으로써, 시위 자체를 근절하겠다는 발상이다. 이는 어떤 이견도 존재하지 않는 매끈한 일원적 세계를 빚겠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는 ‘독재’라고 한다.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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