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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플로렌스의 추억

입력
2015.11.3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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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13일. 실내악팀 인솔자로서 차이콥스키 음악원 부원장 블라디미르 수카노프와 마주 앉은 나는 당황스러웠다. 방문단에 대한 그의 태도는 진지하지 않고 매우 형식적이었다. 사실 교류 필요성은 우리에게나 있었지 그들에게는 딱히 있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가 차이콥스키를 연주한다고 하니 그의 표정은 분명 ‘감히 너희가 차이콥스키를? 그것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에서?’였다. 맞다. 당시 우리는 강한 상대에 대한 도전이 필요했고 그것을 통해 우리 존재를 각인 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모스크바 음악원을, 차이콥스키의 ‘플로렌스의 추억’을 선택했던 것이다. “너희는 우리 문화를 모르지만 우리는 너희 문화를 이렇듯 잘 알고 이해한다. 종속 아니다.”

차이콥스키의 현악6중주곡 ‘플로렌스의 추억’. 3년 가까운 구상 끝에 1890년 여름 한 달 보름 만에 작곡하여 1890년 12월 초연했으나 만족하지 않았던지 작곡가는 첫 악장 코다와 3악장 중간부분, 4악장 제2주제와 푸가를 다시 써서 1892년 12월 개작 초연했다. 작곡가의 기법이 한창 무르익던 50세 때의 작품이기에 연주자들의 기량과 음악성을 잘 증명할 수 있는 곡이다. 또 각기 쌍으로 구성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6주자들 간의 호흡, 앙상블이 매우 중요해서 연주 시 끊임없이 남의 소리를 듣고 맞춰야 하고 내 몫의 소리는 책임져야 되는, 앙상블 경험이 충분치 않으면 소화하기 힘든 곡이다. 사라 장도 실내악 멤버로서 의욕적으로 도전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 날 차이콥스키 음악원 라흐마니노프홀에서의 크누아 챔버 연주회는 감동 그 자체였다. 이 순간 학생들은 더 이상 어린 학생들이 아니라 완성도 높은 연주가였으며 평상시 떠들고 까불던 학생들이 아니라 예민한 감성과 진지한 내면의 인생을 대표하는 원숙한 인간들이었다. 이 점은 늘 어린 학생들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이해불가한 음악의 신비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일상 속에서는 전혀 엿볼 수 없는 아이들의 감추어진, 진지하고 심오한 성찰에 의한 것과도 같은 표현. 이는 단순히 타고나거나 길들여진 음악성만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마치 스포츠처럼 젊기 때문에 강한 무엇인가가 음악에도 있다고 본다.

음악회 후 모스크바 음악원 측으로부터 앞으로 앙상블을 같이 했으면 좋겠다는 등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서로 딴 소리 하던 부원장도 태도가 싹 바뀌었다. 자기들 학생들은 앙상블이 안 된다는 둥, 진짜로 한국 교수들이 가르쳤냐는 둥…. 제일 감동적이었던 것은 라흐마니노프홀에서 악기 세팅을 하던 오랜 경력의 할아버지의 언급이었다. 지나가다 말고 통역을 통해 “어떻게 어린 한국 학생들이 러시아의 혼을 지녔냐?”, “이 연주는 라흐마니노프홀이 아니라 볼쇼이홀에서 했어야 할 음악회였다”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볼쇼이홀에서는 키신의 독주회가 있었다.

12년 후 지난 주 나는 우리 젊은이들과 미래 중국 음악 문화를 짊어진 중국의 양대 음악학교인 상하이음악학원과 베이징중앙음악학원을 방문했다. 각기 88년, 75년 전통의 음악학교들로 우리 젊은이들은 도니제티 오페라 아리아들과 쇼팽 피아노곡과 ‘플로렌스의 추억’을 연주했다. 이 날도 러시아 때처럼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제1 바이올린 수민. 언제 너랑 같이 이 곡을 연주해 보고 싶구나”, “제2 바이올린 유민. 너는 수민을 도우려는 태도가 보기 좋았고 또한 그래서 그가 더욱 잘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지. 비올라 아름다운 독주 정말 좋았고 제2 역시 그러했다. 첼로 아름다운 선율 좋았고 제2도 저음부를 잘 살려 주었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지안왕의 진정어린 평가였다. 차이콥스키와 우리 젊은이들에게 감사한다. 내게는 ‘플로렌스의 추억’에 대한 추억이 있다.

황성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ㆍ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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