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일어난 지 74년이나 되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가장 숙연해지는 때가 전쟁의 상흔이 남은 곳에 다다를 때다. 혼자 간 여행길에서 노르망디 상륙전이 벌어진 오마하 비치에 가본 적이 있다.
푸르른 바다를 바라보는 절벽에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만든 요새들이 있었다. 콘크리트 방어벽의 두께가 1m, 강철 토치카(진지)의 두께가 30㎝나 되어 놀랐다. 하지만 연합군의 함포 사격으로 벌집이 된 채 남아 있었다. 그런 전투에서 누가 '살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관광 온 청춘 남녀들이 그런 것은 생각하는지 안 하는지, 토치카에 나란히 올라앉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해변 마을에는 오래된 성당이 있는데 높은 벽 위에 낙하산과 함께 걸린 연합군 사병을 추모하는 조각상이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곳에서 붙잡힌 독일군 중에는 일제가 징병한 조선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의 볼고그라드에 가본 적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스탈린그라드'라고 불렸는데 그 상징성 때문에 독일과 소련군이 뺏고 뺏기는 시가전을 벌인 곳이다. 다 무너진 허름한 벽들이 전시용으로 남았는데 안내인은 "원래 제분 공장이었는데 빗질하듯이 날아온 총탄이 박히고 또 박혀서 이렇게 남았다"고 했다. 박물관에는 파편 구멍이 162군데나 되는 독일군 장군의 외투가 걸려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침략국도 참화를 입는다. 일본의 의학자 나가이 다카시의 수필 '로사리오의 사슬'을 보면 그런 체험이 나온다. '아내는 옷 한 벌 못 사고, 외식 한 번 못하던 가난한 연구원의 월급에도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뜨개질로 옷을 짓고 도시락을 싸주며 알뜰살뜰 살림을 꾸렸다. 원폭이 터진 날 나는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집에 가보니 부엌이 있던 자리에 탈 대로 탄 골반과 요추만 남아 있었다. 양동이에 '아내를 주워 담아' 안고서 묘지로 가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도리어 나에게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는 것만 같았다.'
청송의 문화관에 찾아간 적이 있는데 6·25 전쟁 당시에 트럭을 타고 싸움터로 갔다가 숨진 학도병들의 이름이 동판에 줄줄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이런 일을 처음 전해 들은 것은 초등학생일 때다. 그런데 그날 문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 중고등학생들은 너무 어렸다. "이런 아이들이 나라를 지킨다고 총을 쥐고 나갔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광교산에 등산을 가는데 몇 해 전에 산등성이 길 한군데에서 6·25 전쟁 때 숨진 용사의 유골이 발굴되어 작은 추념비가 세워지고 태극기가 꽂혔다. 나는 잠시 묵념을 하고 지나간다.
내가 '손자병법'에서 가장 눈여겨 읽은 대목은 '구지(九地) 편'에 있다. '전투 명령이 떨어지는 날 사졸 중에 앉은 자는 눈물로 옷깃을 적시고, 누운 사람은 눈물이 턱에 닿는다'고 쓰여 있다. 전략가인 손자도 사병들을 그저 전쟁 자산으로만 여긴 것은 아닌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가장 큰 피해는 서민과 청년, 여성과 어린이들이 입는다. 우리나라의 정권이 좌우로 바뀔 때마다 북한에 대해 유화책을 쓰기도 하고 강경책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가장 큰 목표는 '전쟁을 막는 것이 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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