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4월 11일 월요일, 출근길 버스에서 나는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었다. “한국일보 사주이며 IOC위원, 국회의원인 백상 장기영씨가” 여기까지 듣고 ‘아, 사주가 돌아가셨구나’ 하고 알았다. 주격 조사 ‘는 은 이 가’ 중에서 ‘이 가’가 ‘는 은’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려주고 그는 갔다.
‘뼈는 금융인, 몸은 체육인, 피는 언론인, 얼굴은 정치인’으로 하루 25시를 살았던 백상(百想)은 진갑 생일을 21일 앞두고 우리 나이 겨우 62세로 타계했다. 2016년 5월 2일은 탄생 100년이 되는 날이다. 1974년 1월 4일부터 2012년 12월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일했던 나는 본 만큼, 읽은 만큼 그의 이야기를 쓴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14, 백상이 성주처럼 기거했던 한국일보 10층은 불철주야의 다목적 종합사무실이었다. 여러 대 전화의 선이 칡덩굴처럼 무성했던 그곳에서 백상은 휴식과 여백이 없는 삶을 순직으로 마무리했다.
최초의 상업신문을 천명하며 한국일보를 창간한 백상은 학력을 따지지 않고 뽑는 견습기자제도를 확립하고 ‘기자 사관학교’를 일구어갔다. 그는 신문이 사람 장사라는 걸 잘 아는 경영인이었다. 월급은 쥐꼬리만큼 주면서도 인재 욕심이 많아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였고, ‘가는 사람 안 말리고 오는 사람 안 막는’ 열린 경영을 했다. 그의 자장(磁場)과 인력(引力)은 크고 강했다.
상식을 초월하는 도그마, 한없이 짠 산술, 낮밤을 가리지 않고 면전에서나 전화로 퍼붓는 욕설은 아주 ‘창의적’이었다. 성황당에 정성 들여 쌓은 돌멩이를 내던지는 역적들, 신문 망쳐먹을 멍청이들, 월급 도둑놈, 공산당 같은 놈, 일제 순사 앞잡이 같은 놈, 회사 팔아먹는 버러지 같은 놈... 넓고 다양한 그의 ‘부챗살 소통망’도 실은 그 자신이 손잡이를 독점하는 일방적 전달체계였다. ‘장 기자’ ‘왕초’ ‘사주’를 기자들은 ‘장돼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도 백상은 눈물 많고 정이 두터운 형이나 아버지처럼 기자들과 친했고 기자들을 반하게 했다. 원탁회의의 토론과 회의를 통해 좋은 의견은 받아들여 고칠 것을 신속하게 고치는 큰 인물이었다. 백상은 10만 어린이 부모 찾아주기, 1천만 이산가족· 친지 찾기, 부산-서울 대역전경주, 미스코리아 등 수많은 사업을 창의적으로 추진했다. 무모한 도전만 한 게 아니다. ‘컴퓨터 달린 불도저’는 대담하고 세심했다. 서울경제신문은 13년, 일간스포츠는 8년 가까운 준비기간을 거쳐 창간했다.
거구돈면(巨軀豚面), ‘큰 체구에 돼지 얼굴’이었던 그는 실상 감수성이 풍부한 문학청년이었다. 1면에 매일 시를 싣고 다양한 문화사업을 벌였다. 그는 “신문기자는 시인이 돼야 한다. 특히 편집기자는 시를 써야 한다” “사설은 쉽게 써야 한다. 사설 제목은 시와 같아야 한다”고 말했다.
1955년의 미국 여행기 중 ‘기차는 원의 중심(重心)을 달린다’는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명문이다. 1973년 10월의 ‘불가리아 기행’을 백상은 “아, 이 나라도 금수강산이로구나. 오늘은 오늘의 바람이 불고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고 마무리했다.
언론 어록에도 문학적 감성이 풍부하다. “발로 써라” “납이 녹아서 활자가 되려면 600도의 열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활자화되는 기사는 600도의 냉정을 가지고 써야 한다. 뜨거운 냉정, 이 양극을 쥐고 나가는 게 신문이다” “신문은 비판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지만 칭찬하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사건이 발생한 그 시간이 바로 마감시간이다” “신문기자는 술을 마실 자유와 권리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잔은 참아라.”
한국일보의 초록 사기도 시적이었다. 초록을 상징색으로 한 데 대해 백상은 “이른 봄에 갓 피어오르는 낙엽송의 새싹 빛깔 이상 좋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옛날 사랑한 여인이 즐겨 입던 저고리 색을 본뜬 것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백상은 또 치마만 두르면 약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문문한(무르고 부드러운) 페미니스트였다. ‘갓 빨아 다린 목면(木棉) 같은 여자’를 좋아했다. 유엔이 정한 세계여성의 해인 1975년에는 여기자만 뽑았다. 여기자가 많은 신문 한국일보에서는 여성이 최초의 종합 일간지 사장(장명수)이 되기도 했다.
그가 제대로 챙기지 않은 것은 건강이었다. 타계 4일 전인 신문의 날에 골프를 치다가 중단하고 머리가 아프다며 앉아 약을 먹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지만, 제대로 조치를 하지 않았다. 안타깝고 분한 일이다.
그는 이렇게 무리를 하면서 무엇을 지향했던 것일까? 신문만을 생각하며 산 그는 한마디로 철저한 프로였다. 내 나름으로 요약하면 ‘백상백면 일념천행(百想百面 一念千行)’, 백 가지 생각과 백 가지 얼굴로 천 가지 일을 한마음으로 했던 언론인이다. ‘아무도 이용할 수 없는 한국일보’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한국일보’로 발전시키면서 보여준 특유의 리더십과 독창적 인재사랑을 이제는 다른 인물, 다른 매체에서나 부분적으로 볼 수 있다.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결국 백상에 대한 송가이자 만가다. 민망하고 면구스럽다.
임철순 전 한국일보 주필·현 이투데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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