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학이 소위 프라임사업으로 홍역을 치렀다. 어느 한 곳 예외 없이 신청과 심사과정 내내 논란과 갈등을 겪었다. 일부 대학의 경우 총장이 사퇴의 배수진을 치는가 하면, 학생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 시위를 벌인 곳도 있다. 선정 발표 이후에도 논란은 여전하다. 프라임사업을 통한 구조변화를 대학 발전의 전기로 여기는 이가 있는 반면, ‘승자의 저주’를 예견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프라임사업이 뭐기에 이토록 논란일까.
프라임사업으로 불리는 ‘산업연계 교육활성화 선도대학 사업’은 인문학 및 예체능계 정원 축소와 이공계 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대학 구조조정 지원 사업이다. 청년 고용 확대가 시대적 과제이자 정책의 핵심인 상황에서 당장 취업에 유리한 이공계 정원을 늘리고 문과와 예체능계를 줄이는 대학에 돈을 주겠다는 취지다. 이번 일로 ‘문송합니다’로 상징되는 문과계 학생들의 처지는 더 초라해졌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사업이 확정되면, 당장 내년부터 인문사회계 입학정원은 2,500명이 감소하며, 공학계는 4,429명이 증가한다. 자연계와 예체능계도 각각 1,150명, 779명씩 줄어든다. 사업선정 심사에서 탈락하고도 제안했던 계획을 강행할 예정인 일부 학교의 인원조정을 고려하면 내년 모집 정원은 더 변할 가능성이 있다. 이공계 기피가 사회적 문제로 등장해 학제와 인원 조정을 고민하던 게 불과 10여 년 전임을 고려하면 언제 또 구조전환이 재현될지 모를 일이다.
어찌 되었건 우리나라처럼 정부가 각종 평가와 재정지원을 담보로 대학 행정에 개입하는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학제 구성, 취업률, 교원확보율, 연구 성과 등은 대학의 성취를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이나 이를 기준으로 정부가 대학을 평가해 등급을 매기고 그 서열에 따라 정원 조정과 재정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는 필자가 아는 한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의 비리와 방만 경영으로부터 학생을 보호하기 위한 취지라지만 이는 교육부의 평가가 아닌 사법적 규율의 대상이다.
사실 교육부가 재정 지원을 무기로 대학을 좌우하고는 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대학 재정 기여도는 OECD 평균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다. 현재 OECD 국가들의 평균 고등교육 재정지원은 GDP 대비 1.2% 수준이나, 우리의 경우 0.97% 정도에 머물러 있다. 또한 우리 대학의 총예산에서 국가 지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25% 수준인데, OECD 평균은 70%를 넘는다. 등록금 비싸기로 유명한 미국 대학의 경우도 예산 가운데 정부지원비 비중이 40%를 넘는다. 이들 나라에서 재정지원을 이유로 정부가 대학 운영에 개입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평가와 지원을 무기로 정부가 대학을 ‘식민화’하는 행위는 대학교육을 획일화하고 창조적 미래 역량을 소멸시키는 근시안적 선택이다. 무엇보다 권력과 자본의 힘이 대학사회 의사결정의 지배적 권위로 기능하게 되는 순간, 대학은 상상 초월의 위험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 사례가 최근 ‘옥시’를 둘러싼 연구부정 논란이다. 외부 힘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하고 대학 연구실이 단기적 성과주의의 노예로 기능하는 한 우리 대학은 SCI의 쓰레기 더미에서 그 수명을 다할 가능성이 크다.
경영학을 전공한 교수로써 다른 분야에 비해 ‘과한’ 관심을 받는 처지이나 대학 교육은 다소 쓸모없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당장 필요한 지식은 기업이 가르칠 테지만, 괴테와 사르트르 그리고 사회계약설은 자본이 알려주지 않기에 대학이 교육해야 한다. 대학을 중퇴한 스티브 잡스가 캠퍼스를 떠돌며 배운 지식으로 유려한 매킨토시 서체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너무 예외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고전과 사유를 무덤에 던지고서 예외적 성취는 아예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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