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을 마치고 법정을 나왔다. 후덥지근한 날씨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본다. 법정에서 워낙 상대방과 치열하게 다투고 난 후라 머리가 지끈거린다.
다른 유형의 분쟁과 비교했을 때 ‘동업분쟁’은 의뢰인의 감정적 소모가 더 큰 것 같다. 아무래도 한때는 같은 뜻으로 의기투합했던 사이였기에 배신감이 더 크기 때문일까 싶기도 하다.
도저히 동업자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뢰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을 동업자로 선택하셨나요?” 의뢰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처음에는 그런 줄 몰랐죠. 아니, 처음에는 안 그랬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람이 변했어요.”
한 달에 15만 건 이상의 민사소송이 접수된다고 한다. 소송이 왜 그리 많이 발생할까.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민사 분쟁의 대략 3분의 1 이상은 ‘계약’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다. 사업적인 관계를 맺든 아니면 집주인과 임차인으로서 관계를 맺든 우리는 계약을 통해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관계를 맺었기에 갈등도 생기는 법이다.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다면 차라리 만나지나 말 것을’이라는 노랫말을 ‘이렇게 소송할 줄 알았다면 차라리 계약하지 말 것을’이라 바꿔도 될 듯하다.
서로 믿음을 가지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는데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나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떠올려 본다.
‘무상(無常)’.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항상 같을(常) 수는 없다(無)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해서, 현실세계 모든 것은 매 순간마다 생멸(生滅)· 변화하기에, 거기에는 항상불변(恒常不變)한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할 수 없음이 현실의 실상(實相)이라 가르친다. 이렇듯 일체가 무상한 데도, 미욱한 인간은 언제나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 건강이, 내 재산이, 나아가 상대방과 나의 관계가 항상 지금처럼 그대로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는 이룰 수 없는 헛된 꿈. 바로 거기에 모순이 있고 고통(苦)이 있다. 불교 경전에는 “무상한 까닭에 고(苦)인 것이다”라는 표현으로 ‘무상’이야 말로 고통의 전제라고 설명한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일을 도모한다. ‘우리 이 마음 결코 변하지 맙시다. 끝까지 같이 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계약서로 만든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의 상황과 그로 인한 각자의 마음은 미세하게 변해간다(無常). 사업이 잘되어 갈 때는 내가 노력한 것에 비해 상대방이 기여하지 못한 부분이 자꾸 눈에 들어와 손해 보는 느낌 때문에 속이 상한다. 반대로 사업이 어려워지면 상대방의 판단착오나 나태함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 같아 야속한 마음에 부아가 치민다.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는 더 이상 나도 상대방도 처음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이미 상황과 마음이 바뀌었지만 둘 사이에 남아있는 것은 최초의 마음을 담은 계약서다. 무상(無常)한 현재의 분쟁을 규율하는 기준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常) 무심하기 짝이 없는 냉정한 계약서. 그러고 보면 계약관련 법률분쟁은 무상(無常)과 상(常)의 투쟁과 갈등이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거창한가?
동화 ‘어린왕자’에는 사막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그리고 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같은 마음을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거란다.”‘바람같은 마음을 머물게 한다’는 표현에 한참 눈이 간다.
만약 사람의 마음이 변치 않고 한결같을 수만 있다면, 오해와 갈등은 많이 사라지겠지. 세상은 별다른 분쟁 없이 잘 굴러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 같은 변호사는…. 생각만해도 아찔한 일이다.
망상을 접고 다른 계약분쟁 사건을 챙겨 들고 법정으로 올라간다. 이번에는 또 다른 형태의 상(常)과 무상(無常)의 투쟁이다.
조우성 변호사ㆍ기업분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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