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고려 없는 쥐어짜기 만연
6개월 이상 저소득 미납만 95만
지난해 면제 혜택은 5만건 그쳐
여섯 살 딸을 혼자서 키우고 있는 30대 여성 A씨는 수년간 건강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했다. 소득이 없기에 매달 3만 5,000원씩 나오는 보험료도 낼 수 없었다. 지난달 우여곡절 끝에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됐지만 밀린 건보료(180만원)는 고스란히 A씨 몫이었다. A씨는 12일 “아이가 자주 아파 직업을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빼앗길 재산도 없지만 계속되는 압류 협박에 하루하루 불안에 떨며 살고 있다”고 한탄했다.
40대 남성 B씨도 비슷한 사정이다. 사업 실패로 힘든 시기를 보내다 지난해 겨우 건설현장 관리직으로 취업해 건보료를 납부 중인 B씨는 3년 간 밀린 건보료 650만원 앞에서 좌절해야 했다. B씨는 “국민행복기금 채무조정을 통해 빚을 10년간 갚아가기로 하는 등 빚을 청산하는 과정인데 과거 미납된 건보료까지 내야 해 부담이 크다”며 “통장이 압류된다면 어렵게 얻은 직장마저도 잃게 될까 두렵다”고 하소연했다.
소득 자체가 없거나 매우 적어 건강보험료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생계형 체납자들이 생존 투쟁에 나선다. 건보료 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보험료 탕감을 요청하는 ‘결손처분’ 집단 민원을 신청하기로 한 것이다. 시민단체 건강세상네트워크 등은 생계형 체납자 160명이 13일 오전 국민건강보험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뒤 곧바로 결손처분 신청에 나설 예정이라고 12일 밝혔다. 결손처분은 경제적 빈곤이나 행방불명, 해외 이민 등의 이유로 징수 가능성이 없을 때 건보료 납부 의무를 소멸시키는 행정 조치다. 결손처분을 받으면 과거에 밀린 건보료가 면제된다. 기본적으로 소득이나 재산이 없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건보료 생계형 체납 가구 중 결손처분 혜택을 보는 사람은 극소수다. 건보료를 낼 수 없는 형편인데도 납부 독촉을 받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월 보험료가 5만원 이하인 저소득 생계형 체납자 가운데 6개월 이상 보험료를 내지 못한 이들은 지난해 말 기준 95만세대로 집계됐다. 체납 누계액만 1조 1,929억원에 달한다. 그러나 지난해 결손처분 건수는 5만1,348건, 790억원에 그치고 있다.
체납 가구 상당수는 무리한 독촉에 시달리기도 했다. 지난 5월부터 지금까지 아름다운재단 생계형 건강보험료 체납자 지원사업 신청을 위해 상담 받은 건보료 생계형 체납자 197명 분석 결과 79%(154명)는 월 소득이 100만원이 되지 않았다. 이 중에서도 74명은 아예 소득이 없었다. 기초생활수급자 등 사실상 국가로부터 지급불능상태를 인정 받은 이들도 상당수(전체의 59%)가 건보료 납부 독촉을 받고 있었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관계자는 “생계형 체납자의 상황을 고려치 않고 쥐어짜기만 해서는 안 된다”며 “결손처분 제도에 대한 안내를 활성화하고, 근본적으로는 이들에 대한 안전망을 강화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건보공단 관계자는 “월 보험료 5만원 이하인 세대 중 성실히 납부하고 있는 분들도 많기 때문에 이들 중 체납자가 발생했다고 해서 일괄적으로 결손처분을 내리는 건 어렵다”며 “기준에 부합할 경우 결손처분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정말 어려운 분들은 이를 통해 구제가 가능하다”고 답했다.
채지선 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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