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하게 지내는 부부와 저녁을 같이 먹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편이 초등학교 후배다. 그런 이유로 만날 때마다 옛날 동네 추억을 나누게 된다. 그는 옛날 살던 그 동네가 재건축이 결정되어 곧 없어진다고 했다. 즐겁게 식사를 끝내고 돌아왔지만 마음 한구석이 계속 무거웠다. 없어지기 전에 추억 속의 장소에 가보고 싶었다.
바쁘던 일이 끝나자마자 그 동네, 휘경동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휘경초등학교. 35년 만에 방문이었으니, 옛 기억 속의 학교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학교의 자랑거리였던 야외수영장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병설유치원이 생겼다. 교사를 신축하느라 운동장도 줄어들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정문에서 교사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송충이가 우수수 떨어져서 무서워했던 그 길, 그 나무들은 여전했다. 모교라고 해야 하나, 서운하고 쓸쓸했다. 다행히도 아침 등교 때 주로 다니던 운동장 너머 후문은 남아 있었다. 구멍가게와 노점상들은 없어지고 중앙화단이 있는 계단으로 변해있었지만.
아련하게 떠오르는 대로 옛날 등굣길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이쯤 모퉁이를 돌면 중학교가 나올 텐데, 하니 그곳에 학교가 있었다. 오랜 습관 같은 무의식적인 기억은 의외로 정확하다. 휘경중학교 교사도 신축했다. 원래 교사가 있던 자리는 운동장이 되고 운동장이 있던 자리에 새 교사가 지어져 학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내가 사춘기를 보냈던 곳이다.
정문에서 내려가는 골목에 초등학교 여자 동창 집이 있었다. 어쩌다 얼굴을 마주치면 부끄러워 후다닥 지나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집은 다세대 주택으로 바뀌었고 기억만 남았다. 호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꼭 들러서 한입 물었던 핫도그 가게, 친구가 포니 승용차 뒷부분의 말장식을 떼어 내는 방법을 알려주던 골목길, 당시 독재자의 죽음을 뉴스에서 본대로 열심히 설명해주던 내 모습도 보인다. 짝사랑하던 짝꿍을 우연히 볼까 하고 일부러 돌아가던 골목길. 건물은 바뀌었지만 골목길을 따라 거꾸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위생병원 앞 도로변 육교는 횡단보도로 바뀌었지만 주변으로 옛 건물이 꽤 남아있다. 기억과 일치되는 장소가 등장하니 조금 두근두근한다. 언덕길 양쪽으로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던 이 길은 이유 없이 내 기분을 들뜨게 했던 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재개발예정지로 철거 중이었다. 상점들은 문이 닫혔고 집은 비었다. 침입경고 스티커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당시엔 골목이 하염없이 길고 건물도 컸었는데, 턱없이 짧은 골목길은 옹기종기 좁기만 하다. 훌쩍 흘러버린 시간. 그래도 길을 걸어보니 그때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났다. 다음번엔 이 골목도 사라지고 없겠구나. 사진이라도 남겨야지. 찰칵찰칵.
기억에 오래 남아있던 철도 건널목은 고가철로 아래 공원으로 바뀌었다. 하루 종일 쌕쌕이(한번 넘을 때마다 두 번 줄을 돌리는 줄넘기) 연습을 하고, 놀이터에서 숨바꼭질했다. 저기 끝에서 돌면 또 재미난 골목길이 나오는데 거기도 요리조리 재미있었는데…. 거기엔 있어야 할 동네가 없었다. 거대한 가림막이 내 앞에 등장했다. 가림막은 모조리 사라진 빈터를 둘러싸고 있었다. 다방구 하던 골목길, 큰 개가 달려들어 겁먹은 후 피해 다니던 부잣집, 1주일 동안 군것질 안 하고 아낀 용돈으로 정말정말 먹고 싶던 에이스 크래커를 샀던 그 가게도 없었다.
그럼 옛날 살던 집도 사라져 버렸을까. 가림막을 건너 도로를 따라가니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그래 바로 여기, 이 골목이다. 골목은 살아있고 골목 안 조그만 집들은 여전히 그때 그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집으로 뛰어들어오던 기억, 누나들과 장난치던 기억이 선연하다. 골목도 기억하고 있을까. 고맙다. 이 길이라도 살아남아 있어서. 건물은 사라져도 길은 많은 것을 간직한 채 그곳에 있었다. 길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정구원 트임건축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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