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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나만 혼자 칼퇴근 했을 때

입력
2017.02.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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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예비주자들이 앞다퉈 저출산 대책을 대선공약 1호로 쏟아내고 있다. '육아휴직 3년법'과 '칼퇴근법'을 제시한 유승민(왼쪽) 바른정당 의원과 ‘아빠ㆍ엄마 육아휴직 의무할당제’를 약속한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선 예비주자들이 앞다퉈 저출산 대책을 대선공약 1호로 쏟아내고 있다. '육아휴직 3년법'과 '칼퇴근법'을 제시한 유승민(왼쪽) 바른정당 의원과 ‘아빠ㆍ엄마 육아휴직 의무할당제’를 약속한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 한국일보 자료사진

오늘은 그 유명한 MB의 ‘해봤더니’ 문체로 시작해보겠다. 슬하에 2남1녀의 자녀(남편과 10세 아들, 7세 딸. 여보 미안해!)를 둔 엄마로서, 낳을 때마다 따박따박 육아휴직 챙겨 쓴 강철멘탈의 노동자로서, 대선 예비주자마다 앞다퉈 내놓고 있는 저출산 대책 공약에 대해 따져보고자 한다. 육아휴직 그거 내가 밥 먹듯 해봐서 아는데….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이 대선공약 1호로 들고 나온 ‘육아휴직 3년법’은 일단 귀가 솔깃해지는 섹시한 공약이다. 자녀가 만18세가 될 때까지 최대 3회, 최장 3년간 육아휴직을 쓸 수 있게 한다는 건데, 육아가 1년으로 끝나는 단기 프로젝트가 아님을 인식했다는 데 반가움을 느낀다. 고작 젖이나 뗐지 아직 기저귀 차고 직립보행도 못하는 애기를 온 종일 어디다 맡기나. 애달픈 그 마음을 잘 읽은 공약이다.

그렇다고 3년씩이나 쉬는 게 답일까. 두 자녀를 낳으면 무려 6년. 엄마도 꿈이 있는데, 그렇게 오래 직업 필드에서 격리돼 있고 싶지는 않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빠가 1년간 육아휴직을 쓰면 된다. 두 돌만 넘겨도 아기는 어엿한 사람꼴을 갖춰 모성호르몬 과다분비 엄마도 조금은 야멸차게 출근길에 나설 수 있다. 이제 부성호르몬도 좀 분비되게 진화론적 진전을 이뤄야 할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해 육아휴직자 중 남성 비율은 고작 8.5%. ‘이번엔 당신이 육아휴직 좀 쓰지’ 했을 때, 나의 남편은 말했었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남편에서 장남으로 강등된 순간. 남성 육아휴직은 출포자(출세포기자)들이나 하는 거라는 직장문화를 강제로라도 개선하지 않는 한 3년을 주든 10년을 주든 육아휴직은 여성 독박이다.

육아휴직이라는 제도는 사용기간이 길어질수록 여성을 2급 노동자의 트랙에서 맴돌게 한다.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이미 OECD 최고로, 36%나 벌어져 있다. 엄마만 아이를 키우는 것이라는 인식이 개선된다 치더라도 돈 덜 버는 사람이 쉬게 돼 있고, 누가 휴직을 할 것이냐의 최종심급인 경제적 판단에서 여성은 대체로 패자다. 그 결과 여성은 점점 더 도태되고, 임금격차는 개선될 여지가 없으며, 육아는 영원한 여성의 굴레가 되는 악순환. 더욱이 육아란 하는 사람에게만 일이 몰리는 기묘한 노동이어서 어느 날 개과천선한 아빠가 팔 걷어붙이고 나서봐야 “아빠, 진짜 왜 이러세요” 소리나 들을 뿐 끼어들 틈이 없다.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가 대선공약 1호로 내놓은 ‘슈퍼우먼 방지법’은 이 점에 착안, ‘아빠·엄마 육아휴직 의무할당제’를 약속했다. “맞벌이 시대는 왔지만 맞돌봄 시대는 오지 않았다. 여성들은 슈퍼우먼이 되기를 강요 받고 있다”고 그가 말했을 때, ‘맞돌봄’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빠에게 육아휴직 석 달 강제한다고 맞돌봄이 절로 실현될 리는 물론 없다. 자녀를 키운다는 건 생애 주기 한 때 집중적으로 몰입해 해치워야 할 과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는 육아를 해치우고 싶은 게 아니라 자녀와 도란도란 함께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육아휴직 후 아이와 작별할 게 아닌 이상 노동시간 단축이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돼야 한다. 엄마만 늦게 출근하고, 엄마만 일찍 퇴근해 봐야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거듭되는 육아휴직 중 일에만 매진하는 남자 동료들을 보면서, 커리어에 아무 손상도 입지 않은 채 4인 가구의 가장이 된 남편을 보며 얼마나 속으로 흐느꼈던가. 택배 노동자부터 국회의원까지, 육아기 부모부터 어린이집 교사까지 모두가 동시에 칼퇴근 하는 ‘오후 5시의 정치학’이 현실화하지 않는 한 출산파업의 도도한 흐름을 되돌릴 수 없다. 유승민 의원의 2호 공약 ‘칼퇴근법’을 ‘3년 육아휴직법’보다 더 환영하는 이유다. 실현 가능한 고용창출의 거의 유일한 방책이라는 점에서도 노동시간 단축은 이번 대선의 핵심 어젠다가 돼야 한다.

공약집 한 귀퉁이에 구색용 여성정책으로나 들어 있던 의제들이 무려 대선공약 1호의 타이틀을 달고 여기저기서 나오는 걸 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복직 일주일 만에 과로사한 공무원 워킹맘 얘기를 읽으며 떠오른 무교동 사거리의 어느 겨울날. 첫 아이 낳고 복직한 지 얼마 안 됐던 그 때, 신호등 바뀌기를 기다리다 불현듯 나는 울었다. ‘아, 나는 자살할 자유를 잃었구나.’ 어떻게라도 살아남아 새끼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 너무 무서워 거리에 선 채 통곡했던 그 마음이 그 사무관에게도 똑같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시기상조인가. 시기가 무르익어 이제는 해도 좋다, 하는 그런 때는 영영 오지 않는다. 다른 대선 주자들에게선 어떤 공약들이 나오는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볼 테다.

박선영 기획취재부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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