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4.18
스탈린의 집단농장 정책에 가장 격렬히 반발한 곳이 개인 경영 전통이 완고하던 우크라이나였고 제국 말기의 부농 쿨라크였다. 소비에트 정권은 1930년대 초 우크라이나 집단농장 생산량이 목표에 미달하자 군대를 동원해 가축과 농산물, 종자까지 약탈해갔다. 1932~33년의 우크라이나 대기근 ‘홀로모도르’가 그렇게 빚어졌다. 훗날 국제사회가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 살해)’로 인정한, 그 인위적 대기근으로 1년여 사이 250만~350만 명이 숨졌다. 1941년 독소전쟁 초기 침략군 나치를 우크라이나 인들이 반긴 것은 스탈린 체제에 대한 그 원한 때문이었다.
이반 데먀뉴크(Ivan Demjanjuk, 1920~2012)는 우크라이나 농촌 두보비 마카린치라는 곳에서 태어나 인육까지 먹어야 했다는 저 대기근의 시대를 살아남았다. 독소 전쟁에 붉은군대로 참전했고, 이듬해 나치 포로가 돼 독일의 소비에트전범 수용소에 갇혔다.
나치는 포로 가운데 자원자를 선발해 전선이나 군수공장 등에 배치하곤 했다. 데마뉴크는 강제수용소 봉사자(교도관)로 일했다. 포로로 종전을 맞이한 그는 52년 그는 미국으로 이주해 58년 시민권을 받았고, 성을 존(John)으로 바꿨다.
구 소련 정부자료에 의해 그가 전시 나치 트레블링카 학살수용소에서 ‘이반 뇌제(Ivan the Terrible)’라 불린 악명 높은 교도관이라는 의혹이 불거진 건 1980년대 중반이었다. 전범 용의자로 이스라엘로 송환된 그는 1988년 4월 18일 이스라엘 법원에 의해 유죄로 인정돼 며칠 뒤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법원은 “한 점의 의혹도 없이”그를 트레블링카 가스실의 ‘이반뇌제’라고 선언했다. 사람을 오인한 것이라고 부인했던 그는 즉각 항소했다. 그가 이반뇌제가 아닐 수 있다는 다른 증거와 구 소련의 자료가 조작된 정황이 드러나면서 그는 93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미국에 재입국한 그는 98년 시민권을 회복했지만, 2001년 트레블링카가 아닌 다른 수용소에서 교도관으로 일한 사실이 드러나 미국 재판에 회부됐다. 시민권 박탈과 함께 강제추방을 당한 그는 2009년 독일 재판정에 섰고, 2년 뒤 뮌헨 지방법원서 최소 2만7,900명의 유대인 살해에 연루된 혐의로 금고 5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항소 절차가 진행되던 2012년 3월 17일(향년 91세) 미결수 신분으로 숨졌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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