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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입력
2017.12.21 13:5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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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살았던 시절의 경험 중 가장 좋았던 건 100년이 넘은 아파트에 살아 보았다는 것이다. 오래된 도심 지역이라 건물들은 대부분 백년, 이백년은 족히 된 건물들이었고, 강 건너 마을에는 몇 백년이나 된 소위 르네상스 시대의 건물들이 즐비했다. 그 곳에도 사람들이 살았고 예쁘게 꾸며진 상점과 레스토랑이 있었으며 주말마다 장이 섰다. 우리가 살던 집은 하수관이 낡았지만 큰 문제없이 살았다. 우리는 왜 이런 곳이 없을까. 백 년 된 아파트나 건물이 이렇게 희귀할까.

한국 건축은 주로 목재로 지어졌고, 근대 시기에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이나 새로운 건축물들이 전쟁을 겪으며 많이 파괴되었기에 오래된 건물이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결론에 이르지만 아무래도 아쉽다. 전쟁 후 재건시대에 지어진 건물들도 벌써 오륙십년은 족히 흘렀는데 그런 건물들의 존재도 놀랍게 여겨질 정도다. 백년 된 아파트에 살았던 경험은 오래된 집은 살기 어렵다는 피상적인 생각을 버리게 했다. 아내와 함께 전국의 근대건축유산을 찾아 다녔고, 우리 부부의 큰 취미생활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우리 부부가 공동으로 쓰는 작업실도 1930년대 일본식 집이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터라 그렇게 오래된 거 맞나 싶었지만 1930년대부터 있었음을 옛 지도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가느다란 목재로 지어진 집이 이렇게 튼튼하게 버티고 있다니 가끔 놀라게 된다. 작업실에 머물 때면 시공간을 넘어 80년 전 세상과 만나는 느낌이 든다. 벽지와 합판으로 막힌 천장을 뜯어 세월을 잔뜩 머금은 목조 트러스를 보고 싶은데, 그 트러스 언저리쯤 있을 상량문 같은 것도 찾아보고 싶은데, 월세 내는 집이라 아쉽게 마음을 접곤 한다.

서울에서 가장 많은 수의 집을 찾으라면 ‘아파트’가 아닐까. 충정로를 지나면 등장하는 초록색 충정아파트가 1930년대에 세워진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아파트가 점차 자리를 비우고 새 아파트가 그곳을 채워가는 건 서울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중동, 평촌, 일산, 분당 등 1기 신도시들이 세워진 지 30년이 되어간다. 한 세대를 맞은 이 도시들을 대표하는 풍경이 바로 아파트들이며, 바로 내가 사는 곳이기도 하다.

아파트의 수명은 언제까지일까. 아파트 구조로 가장 많이 쓰이는 ‘철근 콘크리트’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겠지만 관리만 잘하면 백년 혹은 더 이상도 끄떡없는 재료이다. 재료의 중성화나 부실시공, 관리상태에 따라 수명이 변하겠지만 구조체만 놓고 본다면 충정아파트도 앞으로 20년 혹은 더 이상도 사용할 수 있다.

건물의 ‘수명’은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구조체의 수명일 수도 있고,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담아 낼 수 있는 평면이나 공간의 수명일 수도 있다. 구조체도 튼튼하고 평면도 충분하지만 ‘주차’를 해결하지 못해서 수명이 다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짓는다면 더 ‘큰돈’이 되는 ‘경제적 수명’도 있다. 현재 아파트 수명을 가장 좌지우지하는 것이 바로 ‘경제적 수명’일 것이다. 조금만 수리하면 훨씬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데도 망가지기를 기다리는 듯 관리도 안하고 보수도 안 한다. ‘헌 집 줄게 새 집 달라’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핑계가 늘었다. 내진설계가 안되어서 위험하단다.

재건축 연한이 30년이라는 이유로 아파트의 수명은 30년이 되어버렸다. 멀쩡한 집도 ‘헌 아파트’가 된다. 그러나 이제 헌 집 주고 새 집 받는 게 불가능한 시대가 다가온다. 밀도가 높은 아파트가 더 이상 경제적인 투자처가 아닌 시점이 가까워졌다. 이제 아파트의 수명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고치고 쓰다듬고 조금씩 바꾸며 이럭저럭 살다 보면 어느새 100년 넘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지 않을까.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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