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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파릇파릇한 청춘으로 사는 법

입력
2018.04.25 10:53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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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가장 물이 많이 오른다는 곡우(穀雨) 날, 짧아진 봄이 가는 게 아쉬워 꽃구경에 나섰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 뒷산 길로 접어들었는데, 길가에 한 아름은 될 느티나무가 베어져 서너 뼘 밑동만 남아 있었다. 누가 이 나무를 베었을까? 나무 밑동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분홍빛 산벚꽃이 오련한 빛깔을 뽐내는 건너편 산기슭을 바라보다가 깔고 앉은 나무 밑동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목인 줄 알았는데, 밑동엔 연둣빛 새순 몇 가닥이 고개를 쏙 내밀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세상에 오래된 나무는 있지만 늙은 나무는 없구나.

얼마 전 어떤 시골 농부가 쓴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어린이가 자기는 한계가 많고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 소년이 되고, 자기뿐 아니라 남들도 부족한 것이 있고 모순투성이 인간임을 알게 되면 청년이 되고, 남들도 모순과 한계 속에 살아간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할 줄 알면 어른이 되고, 남들뿐 아니라 한계 투성이인 자신마저 사랑할 수 있으면 이미 노인이 된 것이다.” 농부는 누군가가 들려준 이 말을 인용하면서 자기는 어서 노인이 되면 좋겠다, 나이 먹고 머리 희고 허리 구부러진 노인이 아니라, 깊은 깨달음으로 너그러움과 유유자적할 수 있는 성품을 지닌 그런 노인이 되면 좋겠다고.

농부의 글을 읽고 나서 든 생각, 소년 청년 어른 노인이 되는 것이 단지 연령순으로 되는 게 아니구나. 예컨대 스무 살 청년 가운데도 남들이 모순과 한계 속에 살아가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랑할 줄 아는 어른이 있고, 육칠십 먹은 노인도 타인의 모순과 약점을 비난하는 것으로 소일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왕필은 중국의 3대 천재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24살에 요절했는데, 20대 초반에 ‘노자 주석’을 썼고, ‘주역 주석’도 펴냈다고 한다. 천 몇 백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노자나 주역을 안다고 껄떡대려면 왕필의 주석들을 읽어야 한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왕필은 주역을 풀면서도 점을 칠 필요가 없다는 점 무용론을 주창했다. 왕실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점에 빠져 주역을 숭상하던 당시 그는 우주변화의 참뜻을 안다면 상(象)과 수(數)는 필요 없다고 했다. 그가 남긴 말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런 구절이다. “천재지변이고 인간의 길흉이고 간에 모두 사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의 순환운동인데 뭣 하러 그걸 피하고 구하고 하는가?”

왕필은 이처럼 스무 살 언저리에 벌써 우주의 이치를 통달하고 길흉화복에서 자유로운 인물이었다. 그를 생각하면 나이로 인간의 성숙도를 판단하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예수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서른 살 언저리에 벌써 개별적 자아를 넘어 우주적 대아(大我), 곧 사랑에 근거한 신의 왕국을 주장했으니, 청년에 해당하는 나이에 완숙한 생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나이를 따지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어떤 노인들은 나이 먹은 것을 가지고 젊은이의 기를 죽이려 하고, 또 어떤 젊은이들은 탱탱한 피부와 근육, 혈기왕성한 힘을 뽐내며 기력이 쇠한 노인들을 깔보기도 한다. 이 두 경우가 다 숫자의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어리석은 생의 태도가 아닐까.

지구라는 별에는 타성과 고정관념의 두꺼운 갑각을 벗어던지고 파릇파릇한 청춘으로 살았던 노자나 장자, 왕필, 예수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그들이 나이와 상관없이 어떻게 창조적 젊음을 온몸으로 살아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기에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거두지 않고 산다. 그들이 남긴 언어는 우리 삶의 희망과 용기를 북돋는 싱둥싱둥한 말씀으로 살아 있지 않은가.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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