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수업 중에 받았던 가장 당혹스런 질문 하나를 소개해 본다. “선생님 왜 고등학생은 염색이나 파마를 하면 안되나요? 누구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요.”, 평범한 대답으로 응수한다. “좀 학생답지 않잖아”, 그런데 이 학생이 물러날 줄 모른다. “그런데요, 선생님. 초등학교 때는 파마나 염색을 해도 아무도 무엇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왜 중고등학생만 허용되지 않나요? 오히려 초등학교 때 규제하고 성인의 전단계인 고등학생은 허용해 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9월 27일 서울시 교육청의 조희연 교육감은 서울시 중ㆍ고등학생에 대한 두발 자유화를 선언했다. 내년 2학기까지 머리 길이 규제는 완전히 없애고 파마와 염색은 구성원의 의견을 물어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논쟁의 첨예함에도 불구하고 교육감의 이번 조치는 환영할 일이다. 핵심을 짚어보자. 우선, 다른 취향을 잘못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개취(개인의 취향)’라는 말이 유행하듯 취향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개개인의 호불호와 관련이 깊다. 필자가 대학을 다닐 때는 남자가 염색을 하고 귀를 뚫는 것이 교수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곤 했다. 머리 제한이 5cm이던 시절의 성인은 10cm 길이의 학생이 탐탁지 않다. 10cm를 경험한 성인에게 15cm는 문제가 많다. 파마와 염색 등이 학생답지 못하다는 생각은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의 호불호 문제일 수 있다.
둘째, 모든 상황을 ‘깨진 창문 이론’으로 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개인의 취향을 인정하겠지만 그런 개개인들 때문에 공동체의 질서가 무너진다는 우려는 ‘깨진 창문’의 공포감에서 비롯된다. 특별히 이 주장은 학교 현장 교사들에게서 설득력을 가진다. 많은 학교가 규칙을 엄하게 집행하는 이유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두발의 자유가 학교를 무너뜨린다는 생각은 과도한 두려움이다. 이는 규칙이 완화될 때마다 있어왔다. 학생 인권 조례가 2010년 제정되었을 때도, 교사의 체벌이 엄격히 금지되었을 때도 학교가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가 있어왔지만 학교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미 두발에 대한 자율적 결정이 보편화된 시도교육청의 사례를 보면 학생들의 삶이 무분별해졌다는 말은 들려오지 않는다. 느슨해진다는 것이 꼭 붕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느슨해진다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필연적 결과물이다.
학생다울 필요도 있고 학교의 질서유지를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해보자. 하지만 그것들을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 성찰이 필요하다. 학교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부여받은 곳이 아니다. 헌법적 가치와 법률의 한도 안에서 학생에 대한 지도 행위가 행사되어야 한다. 헌법이 말하는바 ‘신체의 자유’나 ‘소유권’의 본질적 권리는 학생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침해받을 수 없는 권리이다. 두발 규제를 이유로 학생의 머리를 깎아버리거나 도난을 이유로 학생들의 소지품을 검사하는 행위들은 그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반헌법적 행위이다. 지금까지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독재정권의 법치 무시와 궤를 같이 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분야가 독재 이후 민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학교는 이런 건전한 민주성 회복을 위한 좋은 교육의 장소여야지 반민주적 의사결정이 실현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자유를 넘어선 방종, 주변 학교와의 비교, 미성숙한 학생들의 잘못된 결정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교과서가 아니고 경험을 통해 축척되는 것이다. 두발 자유화를 포함한 논쟁적 과제들을 교육주체들이 머리를 맞대 해결하고자 할 때 민주적이고 건전한 학교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봉수 서울 덕성여고 교사ㆍ좋은교사운동 사회쟁점교육위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