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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건축가의 마지막 프로젝트

입력
2019.02.22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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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가 주인공이라는 말에 혹해서 영화관에 갔다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을 했다. 히어로물이나 SF를 사랑하는 내가 작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감동하는 일은 극히 드문데 이 영화는 달랐다. 직업적 공감대도 있었지만 나이 드는 것이 참 멋진 일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되어서였다.

일본 아이치현 가스가이시 고조지 뉴타운의 귀퉁이에 목조 가옥을 짓고 살아가는 90세, 87세의 부부가 주인공이다. 건축가 슈이치씨는 1960년대 고조시 뉴타운 계획에 설계자로 참여했다. 그는 자연과 공생을 목표로 산을 중심으로 편안하게 연결된 설계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고도 성장기의 시대적 상황은 그의 계획대로 도시가 만들어지도록 놔두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콘셉트였던 산을 허물고 그곳에 더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슈이치씨는 실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반성의 의미에서 어떻게 하면 자연의 혜택을 거주자들에게 더 줄 수 있을까 궁리했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뉴타운에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살면서 숲을 만들었다. 자신의 생각을 다른 방식으로 실행해나간 것이다. 그것은 책임감이었다.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한 책임. 그는 수십 년 동안 그 책임을 다했다. 그가 초대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부부는 자연과 어우러진 ‘슬로라이프’를 실천했다. 건축가는 말한다. 모든 해답은 위대한 자연 속에 있다고.

그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나라도 몇 년에 한번씩 새로운 신도시와 뉴타운이 생겨나고 있으니 아마도 수많은 도시설계자들이 있을 터. 그런데 자신이 설계한 도시에 살고 있는 도시계획가나 건축가가 있을까? 그들은 그곳에서 만족스럽게 살고 있을까? 나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내가 설계한 집에 사는 일은 충분히 만족스러울까? 건축주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은퇴한 건축가에게 생의 마지막이 될지 모를 프로젝트 의뢰가 들어오면서 잔잔하게 흐르던 영화가 긴장된 호흡으로 넘어간다. 정신과 병원 계획이었다. 고도의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일에만 몰두하다 정신적 고통에 빠지게 된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공간을 원했던 병원 측은 자연과 함께 살아온 건강한 노년의 건축가가 적임자라고 본 것이었다. 노 건축가는 설계비를 모두 거절한 채 자신에게 일을 맡겨준 것에 고마워하며 작업에 몰두한다. ‘저도 이제 90세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좋은 일을 만나게 되었네요.’ 라며 담담하게 응대했지만 그는 기뻤고 몹시 들떠 있었다. 의뢰를 받자마자 며칠 만에 집중해서 그려낸 계획안에는 그다운 코멘트가 적혀 있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꾸준히, 시간을 모아서 천천히’.

50세면 회사에서 떠나야 돼, 은퇴하면 막막하다, 가늘고 길게 살아야 돼, 어느덧 내 귀에도 이런 자조 섞인 말들이 종종 들리는 나이가 되었다. 늙으면 건물주나 돼야죠, 라는 건 너무 슬픈 말이다. 돈, 권력, 명예, 혹은 안락한 생활, 노후의 목표가 이래서는 너무 재미없지 않은가? 한 분야에서 일하다가 은퇴를 했다면 분명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분야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나가는 게 좋은 노후의 모습이 아닐까. 꾸준히 시간을 모아 천천히 말이다.

나에게는 은퇴는 없다, 무엇이든 짓고 도움이 되는 일을 할 거다, 라고 굳게 생각해 왔다. 포기하지 않으면 언제든 현역으로 일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제 조금은 더 구체적인 생각들을 ‘천천히’ 펼쳐볼 계획이다. 나 역시 늘 나의 마지막 프로젝트가 궁금하니까. 그리고 지금부터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마지막 프로젝트의 모양도 달라질 테니까. 영화 제목은 ‘인생후르츠’다.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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