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갈등에도 아무런 반응 없는 미국
한국 반도체 피해 수혜자는 미국 기업
‘미일 밀약’ 경계하며 對美 외교 주력을
최근 5년간 한국 언론에 의해 가장 난타당한 미국 외교관을 꼽으라면 단연 웬디 셔먼 전 국무부 차관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인 2015년 2월 한일 과거사 갈등과 관련, “정치 지도자가 민족 감정을 이용해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런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고 말했다. 위안부 문제로 한미일 삼각동맹이 균열 조짐을 보이자, 일본에 대한 한국의 사죄 요구가 지나치다는 시각을 드러냈던 것이다. 발언이 전해진 뒤 한국 언론이 들끓었고, 결국 당시 안호영 주미 한국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원래 의도와 다르게 보도됐으며 진정성을 알아 달라”고 해명해야 했다.
셔먼 전 차관 사례가 보여주듯 역대 미국 정부는 당파를 가리지 않고 한일 갈등 조절에 적극적이었다. 한미ᆞ미일 동맹이 동북아에서 소련이나 중국을 견제하는 두 축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는 한일 경협 분야에서, 이후에는 과거사 문제에서 한일 갈등이 터질 때마다 미국의 개입이 이뤄졌다. 개입의 형태는 대개 경협이나 과거사 문제에서 한국의 요구사항을 일본이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쪽이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오바마 전 대통령이 “실망했다”고 비판하거나 “위안부는 끔찍한 인권탄압”이라고 한 게 대표적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일본의 최근 반도체 보복 조치에도 워싱턴에서 눈에 띄는 반응이 없는 건 매우 이례적이고 우려되는 대목이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한일 갈등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것일 수도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 사이의 밀약이 있는 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미국의 침묵에 주목하며 우리 정부 대응이 안이하다고 걱정한다. 정부는 “삼성, 하이닉스의 반도체 생산이 차질을 빚으면 미국 여론이 일본을 향해 들끓을 것”이라고 하지만, 일본이 100여년 전 ‘가쓰라ㆍ태프트 밀약’처럼 미국과 또 다른 밀약을 맺었다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반론이다.
‘미일 반도체 밀약’의 논리 구조는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미국이 한국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고, 한국 반도체의 절반이 중국으로 수출되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실제 세계 D램 시장의 20% 가량은 미국 마이크론이, 낸드플래시 시장도 미국 점유율이 30%에 달한다. 한국에서 생산된 반도체의 50% 가량이 중국으로 수출돼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4차 산업에서 미국을 추월하려는 시도에 사용되고 있다.
공공부문에 근무하기 때문에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갑갑한 정부 대응을 한탄하더니, 스스로 이렇게 묻고 답했다. “한국 반도체 공급이 차질을 빚으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나라가 어디냐. 바로 중국이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타격을 입으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미국 업체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복이 중국의 4차산업 혁명을 주저앉히고, 미국 반도체 기업에 활로를 열어주는 등 미국 국익에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문가도 일본의 절묘한 보복 시점을 놓고 크게 걱정했다.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일본 외교 특성상 G20 정상회의가 끝나자마자 아베 총리가 문재인 대통령을 공격한 건 트럼프 대통령의 묵시적 동의가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결국 중요한 건 ‘해법이 무엇이냐’인데, 실현 가능성을 차치하고라도 ‘미일 밀약’을 걱정하는 이들의 결론은 한결같다. 일본 제품 불매, 대일 무역보복 등 국민 감정에 편승하는 대신 미국을 겨냥해 서둘러 외교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아베 총리의 감언에 트럼프 대통령이 넘어갔다면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적폐로 몰릴 것이 두렵다”며 익명 사용을 요청한 한 인사는 “이제라도 망가지고 끊어진 대미ᆞ대일 라인을 복구하고 아베 총리의 행태가 미국의 국익을 저해할 뿐이라는 논리를 개발하고 설득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조철환 뉴스3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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