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사람의 한명으로 가장 난감한 순간이 모르는 단어가 등장했을 때이다.
그것은 자존심의 추락과 함께 자괴감이 드는, 심히 곤란한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러한 상황이 자주 벌어지고 있는데, 바로 신조어 때문이다.
주로 젊은이들이 만들고, 사용하는 단어인 신조어는 SNS의 발달과 함께 생성된 것으로 폴더폰 세대인 우리에게는 낯설고 당황스러운 단어들임에 틀림없다. 사실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 신조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지금도 혼란스럽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전에 실릴 정도로 사회 전반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입가에 미소가 뜨게 만드는, 묘한 매력의 신조어가 등장했다. 바로 ‘현타’이다.
현타는 욕구 충족 이후에 밀려오는 무념무상의 시간을 일컫는 신조어인데 ‘현자(賢者)의 타임’, 또는 ‘현실자각 타임’의 줄임말이다. 현타가 등장한 건 다양한 세대가 공존하는 장소에서였다. 나는 동네 공공체육센터에서 수영을 하는데 다양한 계층과 세대의 사람들이 모인다. 입시를 준비하는 재수생에서부터 부동산 중개소를 하는 할아버지까지. 내가 수강하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현타가 모습을 드러낸 건 수업이 마무리되기 직전이었다. 모두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수업이 끝나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현타왔네.” 아마도 초급반의 젊은 수강생이었던 것 같다.
“그게 뭔 말이야?” 강사가 물었다.
“현자의 타임의 준 말이에요. 욕망이 모두 사라진 후의 허무함, 그리고 현실의 직시? 뭐 그런 말이에요.”
뒤를 이어 질문과 나이든 분들의 우려가 이어졌다. 하지만 내 관심을 끈 건 단어 자체가 가진 묘한 공감대였다. 우리는 모두 흡사한 경험을 갖고 있다. 욕망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의 선택이 불러온 어리석은 결과를. 이러한 일들은 우리 일상에 비일비재하게 널려 있다. 가장 흔한 예가 다이어트 아닐까. 건강과 미용을 위해 우리는 거의 매일 다이어트를 선언하지만 점심 때가 되면 포만해진 위장을 보며 자괴감과 허탈감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현자의 타임.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섣부른 결혼일수도 있고, 어리석은 투자일 수도 있다. 교만한 거래일 수도 있고, 비겁한 댓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욕망이 사라진 후 뒤를 돌아본 우리는 뒤늦게 깨닫는 것이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그것은 우리가 현자가 아니기 때문에 느끼는 ‘현실자각 타임’인 것이다. 그 모든 걸 단 두자의 단어 안에 함축한 것이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단어를 만든 걸까.’
나는 이 단어를 통해 신조어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현재 우리 시대의 가치관에 맞게 재구성된, 또 다른 언어인 것이다. 500년 전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의 진화된 모습인 것이다. 그 모든 걸 깨닫게 해준 단어. ‘현타’. 나는 이 단어가 심히 맘에 들었다. 그리고 그 후로 버릇처럼 사용하기 시작했다. 수영 후 녹초가 된 몸을 물 위에 띄우며 중얼댔고, 공짜 뷔페에서 허리띠를 풀며 읊조렸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달았다.
얼마나 자주 사용했는지 동료들이 짜증을 내기까지 했다.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젊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 같아 안쓰러워 보이거든요.”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토록 훌륭한 철학을 담은 신조어를 발견했는데. 그래서 대답했다.
“얼마 전 수영 수업을 끝내고 천장을 바라보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트럼프랑 시진핑이랑 불러서 같이 수영을 하는 거야. 그리고 녹초가 됐을 때 같이 천장을 보면서 동시에 말하는 거지. 현타왔다. 그때 둘이 협상을 하면 조금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그러자 동료가 말했다.
“지금 저한테 현타가 오네요.”
장용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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