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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베토벤, 지구의 회복을 북돋는 인간의 음악

입력
2020.04.15 04:30
수정
2020.04.16 17:22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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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제 좀 정신이 들어?” 병상에 누워 있던 지구에게 다람쥐가 묻습니다. 지구는 가까스로 기운을 차려 몸을 일으킵니다. 바다 거북이와 북극곰도 침상 곁에 모여 지구를 극진히 간호합니다. 병실 밖 하늘은 먼 산이 창문 안으로 성큼 들어올 만큼 맑디맑습니다. 위태로웠던 지구의 건강을 이만큼이나마 회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지구가 맞고 있던 링거, 코로나 덕택이었습니다. 삶의 근거지 빙하의 파괴에 몸부림치던 북극곰, 해변을 빽빽이 점령한 휴양객들로 산란의 공간마저 빼앗겼던 바다거북이가 누구보다 지구의 회복을 기뻐합니다.

코로나 위기에 다시 숨쉬기 시작한 자연, 며칠 전 접했던 한 신문의 만평은 이렇듯 뼈아픈 역설을 깨우치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마음이 머물러 여러 생각이 일렁입니다. 인간이어서 죄책감을 느꼈고 인간으로 소외되어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돌연 이 장면에 음악을 입히고 싶어집니다. 지구의 회복을 기원하는 음악, 자연의 목소리를 번역해 증폭시켜 주는 음악 말입니다. 북극곰이나 거북이처럼 지구 곁 침상을 지키며 의지가 되어 줄 음악가도 찾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한 얼굴이 금세 떠오릅니다. 자연의 영혼에 혼신을 다해 귀 기울였던 음악가, 올해로 탄생 250주년을 맞이했지만 어쩌면 스스로 성대한 생일잔치를 마다한 채 지구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을 음악가, 그의 이름은 베토벤입니다.

병상에 앓아 누운 지구의 회복을 북돋기 위해 어떤 음악을 고를 수 있을까요.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라면 작곡가도 흔쾌히 동의할 듯합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4년을 제외하면, 베토벤은 평생에 걸쳐 피아노곡을 작곡했습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전문 연주자 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었다 해도, 베토벤의 중심 악기는 어디까지나 피아노였습니다. 모든 작곡 활동 시기를 아우른 32개 피아노 소나타는 그의 음악 인생이 고스란히 투영된 내면의 일기장과 같은 작품입니다. 베토벤은 자신의 실험적 아이디어를 우선 피아노 소나타에서 실현한 이후, 교향곡과 같은 다른 장르에 활용함으로써 피아노 소나타를 자신의 새로운 기법을 실험하는 매체로 삼기도 했습니다.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32번은

강력한 타격과 함께 지축을 흔들며 시작합니다. 감7도 음정의 가파른 낙폭으로 내리꽂힌 화음은 마치 분노에 찬 땅의 포효를 연상케 합니다. 으르렁거리던 셋 잇단 리듬이 양손 유니슨의 산만한 음형으로 진화할 때 지구를 둘러싼 혼란은 임계점을 향해 치솟습니다. 쐐기처럼 내리박히는 옥타브 스타카토 역시 이 혼돈을 통제하기는커녕 부추길 따름입니다. 1악장은 이처럼 분노한 지구가 토해낼 법한 악상이 만발합니다.

반면 이어지는 2악장은 완연히 다른 길을 걷습니다. 조표의 군더더기를 떼어낸 C장조의 순수성이 위안과 정화를 불러일으킵니다. 땅의 노여움을 달래는 따뜻한 화음은 늦은 오후의 햇볕처럼 충만합니다. 250살 생일을 맞이한 옛 작곡가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리듬에도 활력이 넘쳐 현대의 재즈를 연상시킵니다. 고음역을 향해 상승하는 선율은 바람의 훈풍을 타며 하늘로 오릅니다. 피아노 특유의 투명한 음색을 대기에 흩뿌립니다.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는 3악장으로 완결되지 않은 채 2악장에서 멈춰 버립니다. 인간 세상에선 여운으로 감춰놓았던 마지막 악장이 혹 천상에서 연주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 맞닥뜨린 만평 하나가 이렇게나 상념을 불러일으킵니다. 인간이어서 죄스럽고 인간이어서 서운했던 병상의 장면, 지구 곁을 지키던 북극곰과 거북이처럼 베토벤 역시 인간의 음악으로 지구의 회복을 북돋길 바라봅니다. 지상의 음악계가 성대하게 준비한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희생하고 있는 이유는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릅니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클래식 음악 대중화에 앞장서온 피아니스트 조은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15일부터 <삶과 문화> 필진에 합류해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은 관심과 애독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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