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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악보, 오선지 위 콩나물 음표의 균열”

입력
2020.05.06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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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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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관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독서모임 중에 누군가 이런 화두를 던졌습니다. “음악가에게 악보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작곡가들은 콩나물처럼 생긴 음표를 다섯 개의 선을 층층이 쌓아 올린 오선지에 새겨 넣습니다. 연주자에게 이 악보는 경전과 같겠고요. 하지만 악보는 여러 균열을 일으킵니다. 시간을 지면으로 전환시키면서, 음악적 영감을 기보법으로 구획하면서, 작곡가의 의도를 연주자의 해석으로 표현하면서, 이렇듯 다층적인 균열을 짚을 수 있을 때 악보의 매력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악보나 악기로 음악을 떠올리지만 이런 물건들이 음악 그 자체는 아닙니다. 음이 울리는 순간, 침묵으로 사라져 버리는 음악은 손으로 가리키거나 붙잡을 수 없으니까요. 시간이 지나면 소멸하고 잊힐지 모른다는 인간의 본원적 두려움은 이렇듯 음악의 본질과도 잇닿아 있습니다. 스쳐 지나는 순간을 붙잡아 멈추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음악을 보존하는 악보로 이어진 것이지요.

악보 없이 입에서 입으로 음악이 구전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중세 다성음악의 생존을 증명하는 네우마 악보는 현재 남아있는 판본을 다 모은다 해도 넓은 식탁 하나를 겨우 채울 정도에 불과합니다. 기보법도 완전히 정착하지 않아 해독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음높이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정도만 가늠할 뿐 음악의 속도나 표현력은 모호한 여지를 남겨 둡니다.

현대악보의 기보법은 그때보다 훨씬 더 진화해 왔지만 여전히 드러내는 것만큼 감추는 것이 많습니다. 음의 높이와 길이를 표시하는 데 주력하는 기보법은 미묘한 음색의 차이나 세세한 연주법까지 다 담아내지는 못하니까요. 음정도 피아노 건반의 88개 반음에 국한되어 있어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채로운 미분음을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작곡가의 음악적 영감 역시 물리적 기보법에 한정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연주자들은 악보를 불확실한 근사치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시간예술을 공간개념으로 전환할 때 일어나는 필연적인 균열일지 모릅니다.

이처럼 기보의 틈새, 악보가 다 담아내지 못하는 균열의 지점에서 연주의 예술이 드러납니다. 연주자들은 악보에 새겨진 음표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화적, 개인적 특성까지 총동원해 음악을 달리 표현합니다. 악보가 없었다면 음악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크나큰 어려움을 겪었겠지요. 우리는 악보를 통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악보를 두 페이지 뒤로 넘겨 서로 다른 악절을 나란히 비교할 수 있고 시간을 종이처럼 접어 볼 수도 있으니까요. 음악은 본디 시간 속에서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경험이지만 분석과 이해를 위해선 시간을 들어내고 왜곡하는 과정이 빈번히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흔히 작곡의 과정을 영감이 차오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일시에 쏟아내는 줄로 상상합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많은 작품들이 종이 위에 펜으로 음표를 새기는 물리적 과정에서 진화해 왔으니까요. 그러므로 음악가들의 일상에선 ‘곡을 쓴다’는 표현으로 작곡을 대신할 때가 많습니다.

작곡가와 연주자 사이의 소통을 중재하는 악보는 연주자들이 음악을 상상하고 생각하는 데 꼭 필요한 물건입니다. 연주자들이 악보를 분석하는 것은 거대한 건축물의 투시도를 파악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시각적 설계도를 청각적, 육체적 언어로 변화시키기 위해 연주자들은 부단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자율적인 해석은 작곡가 본래의 의도를 흩뜨려 놓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소비에트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무분별한 해석을 두고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한 야만인이 아름다운 그림에 멋대로 덧칠을 해 망쳐 버렸다. 내 음악 위에 당신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끼적이지 말라. 시간이 흘러 차차 덧칠이 벗겨지면 진짜 그림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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