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양심과 기억을 장담할 수 없다.” 소설가 박민규가 표절 시비에 휘말렸을 때 썼던 반성문 중 가장 좋았던 구절이다. 그렇다. 인간의 기억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자주 재구성된다. 각자의 기억을 확신할 때, 돌이킬 수 없는 갈등과 분쟁이 벌어진다. 그러니 함부로 장담해선 안된다.
더 장담해서 안되는 건 양심이다. 지금 당장 자신을 한번 돌아보라. 얼마나 부끄러운 욕망이 내 안에서 사납게 끓고 있는지. 우리는 작은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척 하지만, 압도적 이익이 있는 큰 유혹 앞에선 자주 흔들린다. 양심은 욕망 앞에서 무력하다. 최근 잇달아 들려오는 사회적 추문 속에서, 나는 비난을 멈추고 나를 돌아본다. 나쁜 환경, 나쁜 타이밍에 놓이면 누구든 쉽게 선을 넘는다.
욕망은 사회적 시선이 거둬진 밀실에 숨을 때, 더 적나라해진다. 구글 검색 빅데이터를 분석한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자신의 책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어둡고 비열한지 실제 데이터로 알려준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모두 공평하게 엉망진창이다.” 나 역시 이 진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근대적 가치인 프라이버시는 이 엉망진창의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욕망으로 분열된 자아가 아무런 여과 없이 벌거벗겨진다면, 우린 도무지 부끄러워 살 수 없을 테다. 그래서 적당히 숨기고 제도로 보호받는다. 인권의 핵심 가치이기도 하다. 유럽 선진국들이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집단 추적 방역과 프라이버시 사이에서 그토록 고민한 이유다.
프라이버시는 뒤집어 말하면 자아를 선택적으로 전시할 수 있는 권리다. 우리는 각자 쇼윈도 하나씩을 가지고 산다. 거기에 최대한 매력적으로 자아를 전시하며, 사회적 평판이라는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한다. 거칠게 말하면, 삶의 본질은 위선이다.
80년대 운동권은 인간의 이런 분열적 본질에 무지했다. 이념의 전체성이 개인의 발견과 성찰을 방해했다. 퇴행적인 ‘조직 보위론’은 이런 문화에 기생한 것이다. 조직 내 성폭력과 성추행들이 운동의 대의를 위해 은폐됐다. 그 사이 앙상한 이념의 구호만 남고, 삶에 대한 세밀한 반성은 생략됐다. 삶은 구체적 욕망의 톱니바퀴로 굴러간다. 몇 개의 거대 서사로 퉁 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안희정에 이은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문은, 이념형 혹은 권력형 인간들이 욕망의 세부를 깊이 성찰하지 못해 일어난 참사라 생각한다. 조직 보위론에서 말하던 ‘큰일 하는 남자’라는 전근대적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체화했을 개연성이 높다. 그들도 알았어야 했다. 삶의 근간을 이루는 욕망이 얼마나 비루하고 위태로운지. 이를 경계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 실수하고 실패한다.
정의기억연대의 회계 부실과 자금 유용 의혹이 결국 검찰 수사로 넘어갔다. 의혹이 단순 실수와 업무상 태만 정도로 드러나면 좋겠지만, 혹여 개인적 비리가 드러나더라도 크게 충격받을 일은 아니다. 도덕적 운동을 한다고, 그 구성원들이 도덕적일 거라 여기는 것은 게으른 생각이다. 다비도위츠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우린 모두 공평하게 엉망진창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추문들은 밖의 사건이 아니라, 실은 일어나지 않은 내 안의 사건일 수도 있다. 추문을 비난하는 건 내가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내 안의 어둡고 너절한 욕망을 잠재우려는 다짐이자 경계의 표현이다. 욕망과 감정은 거대한 빙산이며, 인간의 이성은 그 위에 아주 조그맣게 떠 있는 섬이다. 이 허약한 이성이 평생 내 안의 동물을 다스리는 일이 삶이다. 참 어렵고 위태롭다. 망신은 늘 가까운 곳에 있다. 삶이 끝날 때까지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양심은 절대 장담해선 안된다.
이주엽 작사가, JNH뮤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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