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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판사 출신 정치인에게 바라는 것들

입력
2020.06.09 01:00
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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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C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저울과 법전을 든 정의의 여신상이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앞을 내려다 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저울과 법전을 든 정의의 여신상이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앞을 내려다 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경력이 30년쯤 된 고참판사는 식사 도중 갑자기 십수년 전 자신이 구속영장을 발부했던 피의자 얘기를 꺼냈다.

그 피의자는 경제범죄로 영장이 청구된 중년 가장이었다. 사정이 딱했던 피의자가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 한번 하고 오겠다며 절절할 사연을 호소했다. 판사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긴 고심 끝에 영장을 발부하고 말았단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의 고뇌는 뇌리에 각인됐다. 판사는 피의자의 표정, 그가 했던 말들을 아직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법관이라면 누구나 이런 영혼의 생채기를 품고 산다. 유한한 존재임에도 타인의 신체와 재산에 합법적 제약을 가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았기에, 그 간극이 낳는 고뇌와 번민은 법관의 숙명이다.

그래서 법관은 마지막까지 단정을 삼가며, 의심하고 회의하는 일에 단련됐다. 엇갈리는 증거, 피할 수 없는 선입견, 일방이 보여주는 불완전한 진실 앞에서 방황을 거듭한다. 하급심 결론을 당연히 의심하고, 원심을 깨는 일도 마다해선 안 된다. 실체적 진실 추구에 가려진 절차적 정당성을 감시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다.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 ‘묻지마 폭행범’에게 청구된 구속영장을 ‘위법한 긴급체포’라는 절차적 흠결만으로 기각할 용기도 지녀야 한다.

때로 비상식적 판결과 일부 법관의 비행이 여론을 들끓게 하지만, 그나마 법원은 상대적으로 믿을 만한 국가기관으로 인식된다. 사법농단 사태를 거치고도 기관 신뢰도 설문조사에서 법원 신뢰도는 국회, 검찰, 경찰을 앞섰다.

그렇기에 판사들이 법복을 벗고 더 신뢰도 낮은 집단인 국회로 향할 때, 우리는 다른 직업 출신 정치인들과는 뭔가 다른 기대를 그들에게 건다. 무질서한 정치판에 공정한 절차의 가치를 일깨우길, 공익보다 협잡을 숭상하는 정상배들의 놀이터에 정의의 신성함을 불어넣어주길 바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판사가 그런 기대에 부응해 존경받는 정치인이 된 예는 찾기 어렵다. 숱한 판사들이 서초동을 떠나 여의도에 둥지를 틀었지만, 우리 정치는 공정이나 정의 측면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판사 출신 의원들은 상대 허물을 들추는 공격수 역할을 자임하거나, 같은 편 잘못을 감추는 맹목적 수비수 역할을 떠안으며, 공리(公利) 대신 당리(黨利)에 복무했다.

그나마 짧게 법관 생활을 한 13대 국회의원 노무현을 빼면,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는 모습으로 감동을 준 판사 출신 선량(選良)은 떠오르지 않는다. 20대 국회도 그랬다. 판사 출신 의원들은 동물국회라 불린 난투극을 진두지휘하거나 회의장에 가야 하는 동료 의원을 가두는 일에 가담했다.

판사를 거친 다섯 정치 신인이 입성한 21대 국회엔 기대를 걸 수 있을까. 이들 중엔 현직 판사 시절 사법농단을 폭로하거나 법관대표회의를 이끌며 법원 수뇌부에 입바른 소리를 서슴지 않던 강골들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시작은 실망스럽다. 한 사람은 정의기억연대 사태가 불거지자 정의연을 두둔하는 성명에 법조인 출신으로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그는 의혹을 지적하는 이들을 “친일ㆍ반인권 세력”으로 매도했고 의혹 제기를 “이간질”로 규정했다. 국민 다수가 분노한 사건에서조차 우리 편을 감싸는 데만 급급한 그의 행동은 진영논리와 정치공학에 찌든 기성 정치인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경직된 정당의 위계질서도 이들의 앞길을 막고 있다. 정치 신인의 소신과 개성을 보장하긴커녕 일사불란 단일대오만을 강조하는 정당들의 최근 분위기를 볼 때, 판사 출신 정치인에게 ‘뭔가 다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그들이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그들이 이런 악조건만을 탓하고 있을 수는 없다. 정의와 공정을 좇지 않고 진영의 이익에만 힘을 보태는 그저 그런 정치인이 되고 말 거라면, 굳이 판사 출신 정치인에게 표를 보태 줄 이유를 우리는 찾을 수 없다.

이영창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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