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개성공단 시범기업 리빙아트에서 첫 제품이 생산되던 날 북한 관계자의 발언을 잊을 수 없다. “겨우 냄비 하나 만들자고 우리가 이 중요한 땅을 내준 줄 아나.” 북한 경제를 살릴 첨단기업 입주 대신 경공업, 솔직히 말하면 가내수공업 형태의 냄비 공장이 인민군 막사 자리에 들어섰다는 실망과 핀잔 같았다.
하지만 미국의 반대, 정권 교체와 ‘대북 퍼주기’ 비판 여론 압박에도 개성공단은 명맥을 이어갔다. 덩치도 키워갔다. 비록 2016년 이후 멈춰 선 상태이긴 하지만 남북협력의 상징이자 실제 남북 모두에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평화경제 실험 현장이었다. 문재인 정부도 언제든 다시 문을 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성공단 안에 설치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런 사무소를 북한이 16일 무참히 폭파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 지난 2년 동안 쌓아왔던 남북관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누구의 책임인지 따져두는 것이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 본다.
먼저 이렇게 돌변한 북한 김정은 남매의 태도가 가장 문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1년 집권 후 거의 매년 1% 안팎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2016년엔 3.9%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북한 경제가 더 도약하지 못한 것은 자신들 때문이다.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이어가는 바람에 쌓인 대북제재가 스스로를 옥죈 것이다. 핵도 갖고 경제도 살리겠다는 병진노선은 한계가 분명했다. 안전을 함께 보장해주겠다는 큰 형이 있을 때 핵을 줄여가며 얻을 것 얻고 궁극에는 없애는 결단을 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수 있다.
북한이탈주민의 대북전단(삐라) 살포 문제를 꺼낸 것도 핑계에 불과하다. 이미 남측이 과오를 인정하고 조치를 취하고 있는데도 ‘인민의 분노’ 운운하며 개성의 사무소를 폭파할 정도의 사안인가. 신속히 북한 국민에게 공개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코로나19 경제난 등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외부에서 적을 찾는 낡은 수법에 불과하다.
‘철면피한 궤변, 뿌리깊은 사대주의’라며 남쪽의 한미동맹을 공격하지만 혈맹 중국에 조아리는 북한의 태도도 다를 게 없다. ‘서울 불바다’라는 구태의연한 표현을 또 꺼내 그나마 남아 있던 남쪽의 측은지심을 소진시켜 버리는 것도 실망이다.
미국도 무책임하긴 매한가지다. 2년 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합의 때부터 실천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단계적으로 주고 받을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오로지 재선만 생각했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욕심이 북한을 궁지에 내몬 측면도 있다.
문재인 정부 역시 부족했다. 2018년 9ㆍ19 평양공동선언 이후 미국을 설득해내지 못한 책임은 정부의 한계다. ‘한미워킹그룹’이 오히려 남북관계 발목을 잡는데도 한동안 방치했다. 삐라 살포단체 관리부터 대북특사 전략까지도 세심하지 못했다. 북한의 안보 걱정을 덜어주는 데도 실패했다.
남북ㆍ북미ㆍ한미관계 세 바퀴를 잘 굴려가며 지켰어야 할 한반도 평화가 다시 위기에 내몰렸다. 누군가는 안보 불안 운운하며 싸움을 부추기고 대북정책 변경을 요구하겠지만 지금은 상황 관리가 우선이다. 결국 긴 호흡으로 버티며 북한을 설득하는 수 외에는 없다. 지금보다 더한 말이 쏟아지고 총알과 포탄이 오갈 때도 우리는 ‘일상의 평화’를 목표로 고비고비 헤쳐왔다.
개성공단 방문 기념 선물로 받았던 냄비는 1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쌩쌩하게 잘 쓰고 있다. 허술해 보이던 공장에서 만든 제품이긴 하나 손재주와 정성 덕분일 터다. 만일 북한이 제 분수를 알았더라면, 일단 냄비 하나라도 꾸준히 잘 만드는 실력을 쌓은 뒤 핵 포기로 제재를 풀어 베트남처럼 삼성전자 공장을 유치하는 길을 택했더라면, 우리 아이들은 더 평화로운 한반도에 살고 있을 것 같다.
정상원 정치부 외교안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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