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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점 인플레가 초래하는 학벌주의

입력
2020.08.26 06: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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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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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대학 첫 학기에 ‘법학개론’ 과목을 수강했다. 담당 교수님은 강의 때마다 “피레네 산맥 이쪽에서의 정의가 저쪽에서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파스칼의 말을 자주 인용하였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법이란 무엇인가?” 문제가 출제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멋진 답안을 작성하고자 종로서적에서 책을 사오고, 도서관에서 여러 자료를 빌렸다. 그 후 법의 정의에 관한 부분을 참고하여 논문 같은 답안을 마련했다. 예상 문제가 출제되었고, 미리 준비한 대로 손쉽게 작성하여 제출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교수의 조교가 나에게 교수님을 찾아뵙는 것이 좋겠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래서 연구실로 찾아갔다. 교수님은 답안지 뭉치를 꺼낸 다음 내 답안지를 찾았다. 답안지를 힐끔 쳐다보신 교수님은 “자네는 왜 내가 강의한 내용으로 답안을 작성하지 않았지?” 그 순간 교수님의 취향을 잘못 파악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나는 교수님의 좋은 강의에 보답하고자 여러 책을 참고한 다음, 답안을 작성하게 되었던 점을 말씀드렸다. 그 변명을 들으신 교수님은 “대학생은 교수의 강의를 이해하고 배우는 게 중요한데, 자네는 내 강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다른 책을 보고 답안을 작성하는 것은 올바른 학습 태도가 아니야”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동료들의 답안지를 보여줬다. 정의의 상대성을 말하면서 칠판에 그려놓았던 삼각형 모양의 피레네 산맥도 답안지에 그려져 있었다. 법 과목 시험지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낯설었다. 신입생이라 공부방법을 잘 몰라서 큰 실수를 했다고 했다. 얼마 후 게시판에 법대생의 학점이 과목별로 공개되었다. 눈물어린 변론도 헛되이 법학개론은 C학점이었다.

대학의 성적 처리 지침은 '교과목 담당교원은 성적 평가와 관련하여 객관적 기준에 의하여 공정하고 엄정하게 성적을 처리하고 관리'하도록 한다. 그래도 교수는 학점 부여에 관한 엄청난 재량을 갖는다. 그래서 대학은 학점 등급을 정하여 일정 비율 이상 주지 못하도록 하는 학점쿼터제를 도입했다. 학점은 취업과 진학, 유학 등에서 중요하게 사용된다. 특히 취업난이 심해짐에 따라 교수는 좋은 학점을 주려고 한다. 학생 역시 높은 학점을 받고자 재수강을 하여 학점 세탁도 한다. 서울대는 졸업자 중 64.2%가 A학점을 받아 가장 학점이 후한 대학이라고 한다.

대학들은 지난 1학기를 코로나 재난학기로 인정하여 안 좋은 학점을 포기할 수 있는 학점포기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전국 로스쿨 역시 상대평가 제도를 중단하고, 과목별 수강생 50%에게 A학점을 주었다. 코로나로 대면수업을 할 수 없었던 사정 등을 고려하여 좋은 학점으로 보답한 것이다. 이번 2학기도 대면수업이 쉽지 않을 것이라서, 지난 학기처럼 수강생 절반이 A학점을 받을 것이다. 교실에서 공정한 성적평가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교과목의 이수만을 확인하는 절대평가제(Pass/Fail)를 실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대학이 학점 부풀리기 정책을 유지하면, 열심히 노력한 학생의 수고는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다. 그리고 출신 대학 이름이 취업이나 진학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어 학벌주의가 심화될 수 있다. 대학이 높은 학점으로 학생의 스펙 관리를 도와주는 것으로, 감염병 시대에 대학의 책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형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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