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창 애니메이션 '원피스'를 보고 있다. '원피스'는 바닷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전설의 보물을 찾아 떠나는 루피 해적단의 모험을 다루고 있다. 장장 24년에 걸친 대서사시인 탓에 등장인물도 많고 스토리도 방대해 내용을 따라잡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매회 전해지는 감동과 교훈에 점점 빠져드는 중이다.
'원피스'의 등장인물 중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은 이는 닥터 히루루크다. 스스로 닥터라고 부르긴 하지만 사실 그는 돌팔이 의사다. 근거 없는 의술로 사람들을 치료한다. 더러는 멀쩡한 사람을 골병들게 한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을 의사라고 칭할 수 있는 건 그가 사는 드럼섬에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원래 드럼섬은 의료 선진국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폭군 와포루가 국내 의료행위를 금지하고 유능한 의사들을 주치의로 독점했다. 나머지 의사는 모두 추방되었다.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읍소한 사람만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희망을 잃었다. 마음의 병도 함께 생겼다.
히루루크는 그런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다. 그래서 한 연구에 돌입했다. 바로 벚꽃을 피우는 일이다. 그는 드럼섬 국민들이 벚꽃을 본다면 마음의 병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한때 자신도 불치병을 앓다가 온산에 만개한 벚꽃을 본 뒤 큰 감동을 받아 그 병이 씻은 듯이 나은 기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드럼섬이 1년 내내 겨울만 존재하는 추운 지방에 있다는 것. 당연히 실험은 매번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무려 30년을 벚꽃 연구에 바쳤다.
문득 히루루크를 떠올린 건 얼마 전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지나면서다. 둘은 다른 듯 닮은 인물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지만 거기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삶을 던져가며 주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다. 만일 전태일이 없었다면, 이 나라의 노동자들은 지금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협받으며 저임금 노동에 시달렸을 것이다. 내일은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도 갖지 못했으리라. 그런 점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전태일의 외침은 그가 남긴 희망의 증표였다.
하지만 정작 희망을 말해야 할 정치권은 반대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재보궐 선거 후보를 내는 일에는 그렇게 뚝심을 보였던 민주당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미적거리는 모습은 왠지 씁쓸하다. 그런 와중에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휴대전화비번공개법’을 추진한다고 하니 그동안 주장한 적폐 청산이나 개혁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하는 의문도 든다. 그저 누구 하나 희망을 주겠다는 정치인이 없는 이 현실이 서글프다.
히루루크의 연구는 결국 성공했다. 그러나 자신이 벚꽃을 피우진 못 했다. 왕의 덫에 걸려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제자 쵸파와 드럼섬 국민에 의해 계승됐다. 이들은 마침내 혹한의 드럼섬에서 벚꽃을 피워 냈다.
히루루크는 말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잊어질 때 죽는 거라고.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잊지 않는 한 히루루크도 전태일도 죽지 않는다. 전태일이 떠난 지 50년이 되는 올해, 그의 이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는 사라진 희망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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