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시험을 1년 앞둔 A는 SNS에 ‘승무원을 꿈꾸는 고등학생’이라는 채팅방을 열었다. B가 항공사 여승무원이라며 말을 걸어왔다. B는 고민을 들어주고 승무원 준비에 관한 조언도 해주면서 A의 호감을 샀다. 당시 A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버느라 무척 힘든 시기였다. B는 용한 ‘이모님’이라며 무속인 C를 A에게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다. A는 무료로 점을 봐준다기에 별생각 없이 무속인 C와 채팅을 시작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C가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진심으로 걱정을 해주자 A는 ‘이모님’을 점점 신뢰하고 일거수일투족을 상의했다. 그런데 3달 뒤 ‘이모님’은 “수능성적도 올리고 부모가 화해하는 묘책이 있는데, 해보겠니?”라며 생면부지 남자 D와의 성관계를 제안했다. 처음엔 너무 미심쩍고 무서웠지만 ‘날 누구보다 잘 알고 염려하는 이모님’의 제안이니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이모님’의 관심과 돌봄을 잃는 것이 두려웠던 A는 결국 D가 기다리는 모텔로 가서 성관계를 가졌다. 그날 이후 ‘이모님’은 종적을 감췄다. 나중에 드러난 바로는 B, C, D는 동일인이었다. 그는 여승무원도 무속인도 아닌 30대 남성이었다.
이 사례에서 A의 경험은 미국의 법정신의학자 마이클 웰너(Michael Welner)가 분석한 ‘그루밍 6단계’와 거의 일치한다. 그루밍은 가해자가 애초에 성착취 목적으로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①피해자의 취약성을 파악해 피해자 고르기 ②피해자의 욕구를 파악하며 따스함을 드러내기 ③피해자의 욕구를 채워주기 ④특별한 관계를 형성하여 피해자를 고립시키기 ⑤관계를 성적(sexual)으로 전환하기 ⑥피해자를 회유·비난해 통제를 유지하기 순으로 이뤄진다. 이런 친밀한 접근과 교묘한 조종 때문에 피해자는 스스로 성범죄 피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지하더라도 피해자 대부분이 아동, 청소년이거나 심리적으로 곤경에 처한 고립된 성인들이기 때문에 주변의 도움을 청하기 쉽지 않다. 그루밍 성범죄가 잘 드러나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나 이런 피해자의 특성보다 그루밍 성범죄 근절에 더 큰 난점은 가해자의 인식성향이다. 대개의 가해자들은 ‘애초에 성착취 목적으로 피해자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한다. 나아가 자신의 접근은 순수한 호의와 배려였다고 강변하기까지 한다. 이런 반응은 평소에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데 익숙한 남성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태도이다.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습관처럼 깊이 내면화되어 ‘성착취 목적’을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루밍 성범죄는 이런 잘못된 남성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난 26일 ‘온라인 그루밍’을 처벌하는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법안 통과로 적어도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그루밍 성범죄는 가해의 심각성에 상응하는 적절한 처벌이 가능하게 됐다. 하지만 성인을 대상으로 한 경우는 이번 개정에 포함되지 않아 ‘그루밍’은 여전히 법률적 해석의 사각지대로 남게 됐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그루밍’도 독립된 유형의 성범죄로 입법화되려면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깊이 내면화된 우리 사회의 남성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자각과 성찰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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