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페이싱(흑인 흉내를 내려 얼굴을 검게 칠하는 것)은 지구촌 어디서나 문화적 금기다. 흑인을 비하하는 인종 차별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한국 개그맨들이 대수롭지 않게 블랙 페이싱을 하던 때가 엊그제다. 인권 감수성이 낙후된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반시대적이고 차별적 행위라는 걸 안다. 학습했기 때문이다.
작년 의정부고교 졸업 사진에서 블랙 페이싱 문제가 불거졌을 때, 큰 사회적 소란이 일었다. 한국에서 방송인으로 활동하는 샘 오취리가 인종 차별적 행위라고 SNS에서 지적했다. 하지만 이 당연한 지적이 되레 많은 한국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결국 샘 오취리가 공개 사과문을 올리고 방송에서 하차했다. 그리고 최근 그가 유튜브 방송으로 복귀하자마자 그를 향한 인종 차별적이고 경멸적 댓글들이 다시 쏟아졌다. 이 일련의 도착적 집단 공격성에 말문이 막힌다. 부끄럽다.
인류의 역사는 타자화한 사람들을 나와 동등한 위치에 올리는 긴 과정이었다. 신분제와 노예제가 없어졌고, 인종 차별은 반사회적 범죄가 됐다. 하지만 긴 계몽적 학습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의 차별과 배제, 혐오의 본능은 여전히 살아있다. 사회적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그것들은 샘 오취리를 공격한 것처럼 아주 나쁜 방식으로 드러난다.
페미니즘 역시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은 우리 안에 있는 또 다른 무지와 편견을 깨는 운동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인류사는 곧 남성의 역사였다. 여성은 삶의 배경이거나 장식이었지, 그 주체성이 드러난 적이 거의 없었다. 남성은 우월적 지위를 누렸지만, 그것은 미신과 관습과 편견의 대가였다. 이를 반성하고 교정하는 페미니즘은 남성을, 인간을 훨씬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여성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가치에 헌신하는 새로운 계몽사상이다.
한국에서 여성들의 기회를 넓히기 위해 제도적 개선을 시작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 기회의 확장을 두고 “남성 역차별” 혹은 “여성 우월주의”라고 떠드는 것은 무지한 호들갑이다. 여전히 운동장이 얼마나 여성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는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 젊은 정치인 이준석이 SNS를 통해 “2030 남성의 표 결집력을 과소평가하고 여성주의 운동에만 올인해” 여당이 선거에서 참패했다고 했다. 오세훈 캠프의 뉴미디어본부장을 맡기도 한 그는, 선거 전 청년단체로부터 성평등에 관한 질의서를 받고도 “시대착오적 페미니즘을 강요하지 말라”며 답변을 아예 거부했다. 평소 사회 현안에 합리적 판단을 보여준 그가 이토록 퇴행적 성감수성의 소유자인 줄 몰랐다. 나아가 “페미니스트도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 화장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고 탈코(탈코르셋)하려면 하면 된다. 그게 트렌디하고 안 하면 반동인 듯 묘사하는 순간 싸움 난다”며 페미니즘에 대한 오독을 자랑처럼 얘기한다. 남자들로부터 대상화되어온, 여성성에 대한 철학적 고민들을 경박하게 비하하고 있다.
이준석뿐 아니라 모든 남자가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페미니즘은 자신의 이해에 따라 선택적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이념이 아니다. 이 시대 삶의 기본값이다. 반페미니즘은 블랙 페이싱처럼 편견과 차별에 봉사하는 시대착오적 태도일 뿐이다. 그것을 정치적 자양분으로 삼는 것은, 진중권의 말대로 “질 나쁜 포퓰리즘”이다. 어느 칼럼니스트의 말을 이준석에게 전한다. “세상이 변했다. 이해하기 힘들면 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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