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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집 속사정

입력
2021.05.19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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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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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냉면철이 돌아왔다. 옛날 책에 냉면집에 국수를 상징하는 하얀 종이술을 가게 앞에 매달아 손님을 끌었다고 한다. 내 기억으로는 종이술까지는 아니고, 날염한 빨간색 천에 ‘냉면’이라고 써서 게양하던 게 생각난다. 아니면 하얀색 종이에 마치 입춘대길을 쓰듯, 세로쓰기 붓글씨로 ‘냉면개시’라고 써서 문짝에 붙여놓은 가게가 있기도 했다.

그렇게 식당들은 계절음식으로 냉면을 팔았다. 평소에는 된장찌개, 육개장에 갈비탕을 팔다가 더워지면 줄어드는 매출을 메우려고 냉면을 임시로 팔았던 것이다. 이런 곳은 대부분 고무줄처럼 질긴 공장 면을 사들여 일일이 손으로 떼는 작업을 해야 했다. 아주머니들이 빈 탁자에 앉아 하염없이 그걸 떼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정식으로 압출식 기계를 갖춰 놓은 집들은 그걸 광고하느라 ‘기계 냉면’이라고 써서 붙이기도 했다. 그 시절,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나는 ‘왜 기계로 만든 걸 자랑하지? 손 냉면도 아니고?’ 하면서 의아해했다. 임시로 계절에 파는 공장 냉면은 요즘 냉면광들의 표현대로라면 ‘마이너냉면’이었다. 육수는 대개 사오는 것이었고, 거기에다가 설탕이며 다시다 같은 조미료, 식초 정도를 가감하여 맛을 냈고 매운 양념 한 숟갈에 계란 반쪽으로 폼을 냈다. 토마토와 오이, 수박이 올라가는 것도 표준 조리법이었던 것 같다. 넉넉한 육수에 통깨가 술술 뿌려져 있고 커다란 삐죽이 얼음조각이 몇 개쯤 들어 있던.

냉면을 먹노라면, 까만 짐자전거에 재생 타이어로 만든 속칭 ‘바줄’로 묶은 직사각형의 얼음덩어리가 배달 오기도 했다. 겨울에는 석윳집, 여름에는 얼음집 하는 가게에서 톱으로 쓱싹 썰어서 파는 그런 얼음. 그런 ‘마이너한’ 서민 취향의 냉면은 구경하기 어렵다. 외려 고깃집에서 주는 고무줄냉면이 그 옛날 냉면의 맥을 이어가고 있달까. 고급 냉면이 각광받는 시대이지만, 그런 서민 냉면도 여전히 살아 있다.


필동면옥. 한국일보 자료사진

필동면옥. 한국일보 자료사진


냉면철이 되면 항상 냉면값이 너무 비싸다고들 한다. 미묘한 얘기다. 결론부터 보자면 제대로 된 평양냉면은 원가가 만만치 않다. 메밀가루 가격은 밀가루의 20배로 보면 된다. 수입 메밀은 싼가. 그렇지 않다. 역시 밀가루의 10배는 나간다. 상상 이상이다. 주재료가 상당히 비싸다. 메밀을 칠할 팔할 넣는 집들은 이미 원가에서 큰 부담을 안고 간다. 메밀은 예상과 달리 곡물이 아니다. 씨앗에 해당한다. 과육을 먹는 곡물이 아니라는 뜻이고, 소출이 면적당 아주 적다. 비쌀 수밖에 없는 작물이다.

또 냉면 전문집들은 대부분 틀림없이 육수를 소고기로 내는데, 한우는 언감생심이고 육우나 수입소를 써도 육수 뽑자니 어지간히 넣어서는 제 맛이 안 난다(한우만 쓰는 집도 물론 있다). 조미료를 대부분 넣는데도 그렇다. 더구나 비싸다고 지탄받는 냉면 전문집은 비수기가 길다. 보통 5월에 철이 와서 딱 추석이 되면 손님이 대폭 줄어든다. 비수기에는 직원 월급 주기에도 부담스러운 장사다. 한여름에 장사진을 치고 있으니 큰돈 버는 것 같아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냉면 팔아서 남긴다는 건 쉬운 말이 아닌 것이다. 메밀도 제대로 안 쓰고, 육수도 엉터리이면서 행세하는 비싼 냉면이 문제이지 정성 들여 재료 써서 매겨지는 냉면값은 그럴 사정이 있다. 올여름, 평양냉면집에서 한 대접 드실 때 이런저런 속사정도 알고 드시면 낫지 않을까 싶다.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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