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X, 왜 어른들이 사과를 못 하는데!”
영화 세자매에서 맏이 희숙의 딸, 보미는 외친다. 그 외침은 외할아버지에게 오줌을 눈, 그래서 외할아버지의 생신 잔치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삼촌을 향하지 않는다. 지속적인 가정폭력으로 자식들에게 상처를 준 외할아버지를 향한다. 가족의 역사를 다 알지 못하는 손녀 눈에도 보이는 것이다. 지금,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외할아버지는 벽에 머리를 찧지만 손녀는 또 안다. 그게 제대로 된 사과가 아니라는 것을.
“야, 미안하다, 됐냐?”
누구도 이런 사과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과가 제대로 된 사과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사과를 하는 이의 마음이 진실되어야 한다. 열 길 물속보다 어렵다는 사람 마음을 어찌 알겠냐마는, 떨어지는 시선과 구부러진 등, 둘 곳이 없어 흔들리는 몸으로 상대의 진심을 어렴풋하게 더듬어 볼 수 있다. 둘은, 사과의 목적에 있어 그 주어가 상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 마음 편하자고’부터 ‘남들이 욕하길래’, 혹은 ‘합의 좀 해달라고’ 따위가 목적인 사과는 자위나 다름없다. 세 번째는, 사과를 한 행동에 대해 다시 반복하지 않을 의지를 다지는 것이다. 매일 주먹으로 집안 가전을 때려 부순 후에, 울면서 하는 ‘미안해’를 사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다.
영화 세자매에서 보미가 외친 것처럼, 어른들이라고 사과를 잘하는 건 아니다. 어른뿐이랴. 정제된 언어로 객관적 보도를 해야 할 언론사 중 일부도 사과에는 영 젬병이다. 최근 조선일보는 성매매 사건 기사에 조국 전 장관과 그의 딸 일러스트를 첨부해 논란을 빚고,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다. 전에는 행사 내내 마스크를 벗지 않은 사람의 삽화와 산속에서 3,000여 명 모임 의혹에 대한 기사의 삽화에 문 대통령의 삽화를 넣었다. 홈페이지의 차가운 사과문에서는 둘 곳 없어 떨어지는 시선도, 어두워진 낯빛도 확인할 수 없었다. 사과의 대상도, 목적도 사과의 조건에 맞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후의 행보다.
조선일보는 박성민 민주당 최고위원의 청와대 청년대변인 내정을 두고, 공식 SNS에 ‘쩜오급도 하나 만들지’라는 문장을 붙였다. 쩜오는 룸살롱 은어다. 청와대 청년 비서관, 25세 청년,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을 노린 저열한 모욕이다. 지금은 SNS에서 삭제되었지만 논란이 거세지고 있으니 곧 조선일보의 홈페이지에는 또 다른 사과의 문장이 오를지도 모르겠다. 그 사과는 진실할까? 다른 데 목적이 있지는 않을까? 무엇보다,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할 의지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과일까?
관심을 사기 위해 막말로 선을 넘는 행위에 주목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이야말로 막말을 하는 이들의 목적일 테니까. 발끈하면 상대의 먹이가 되고, 침묵하면 동의라 여겨지는 세계에서 대체 어떤 선택지를 찾아야 할지 혼란스럽다. 유튜브라면 구독을, SNS라면 팔로우를 그만하면 되겠지만, 언론사라면?
영화 세자매에서 자식들은 아버지에게 사과를 요구하지만, 아버지는 묵묵히 머리를 찧는다. 세자매가 셀카를 찍는 마지막 장면에, 아버지는 없다. 사과를 할 줄 모르는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외치느니, 셋이 셀카나 찍는 게 더 나으리라. 우리의 셀카에, 당신은 없을 테니까. 하나, 둘, 셋!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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