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어하는 마음은 모든 부모의 공통적인 욕망이다. 자신을 낳고 길러 준 부모는 필요할 때만 찾게 되지만 자식의 일이라면 조건 없이 희생하려는 태도는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 위한 생물학적 본능 때문일 것이다.
자녀를 키워본 사람들은 임신부터 출산 그리고 처음으로 경험하는 아기와의 눈맞춤, 넘어지면서도 걸음마를 배워가는 모습 등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갓난쟁이가 말을 배우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며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 항상 대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부모와 자녀의 갈등이 시작되면 주도권과 정체성의 대립이 본격화된다.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치매에 걸려 갑자기 사라진 어머니를 회상하며 부모에 대한 원죄를 고백하는 이야기다. 어렸을 때의 ‘부모’는 무엇을 요구하더라도 다 들어줄 것이라 믿었던 ‘절대반지’이다. 철이 들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조금씩 깨닫게 되면 요술 방망이 같았던 그들의 능력은 사실 삶을 갈아 넣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마련이다. 자신들이 잘나서 이루었다고 믿었던 성과물이 대부분 부모에게 진 빚이었음을 인정하는 단계에 도달했을 때는 값진 인생의 채무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이미 저세상으로 가버린 경우가 많다. 그 빚을 갚기 위해 선택하는 가장 잘못된 방법이 '자신의 자식을 채권자로 만드는 것'이다.
최근 특목고가 기회의 평등과 공정한 경쟁에 반하는 제도라는 소신을 밝힌 저명인사들 중에는 능력주의(meritocracy)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자식은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이중적인 잣대를 가진 사람이 너무나 많다. 자신의 자녀들에게 우수한 DNA를 물려준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열악한 국내의 교육환경을 벗어나서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기도 한다.
반면 자신들은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성공했다고 믿기에 자녀들에게 훨씬 좋은 공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은근히 강조하기도 한다.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해서 우울감을 호소하는 젊은이 중에는 부모에 대한 자격지심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삶의 지혜를 전수하는 훌륭한 부모도 물론 있겠지만 세련된 화술로 자식의 나태함을 윽박지르면서도 본인들의 양육방식은 매우 자율적이라고 항변하는 경우도 가끔 접하게 된다.
부모보다 능력이 모자란 자식을 지켜보는 것은 괴로울 수 있지만 그 부족함을 채워주겠다고 자신의 배경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적어도 지도층의 처신으로는 적절치 않다. 심지어 부모의 마음도 몰라주는 못난 자식을 위해 본인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동정심을 유발하는 발언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마이클 샌델이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비판한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이들은 편의적으로 오독하는 것을 넘어 ‘세습주의(aristocracy)'를 너무나 당당하게 옹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온갖 역경을 딛고 성공했다는 586세대들은 자신의 인생철학이 무엇인지를 돌이켜봐야 할 때이다. 자식에게 부와 지위를 대물림하기 위해 온갖 궤변과 꼼수를 일삼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부끄러운 자기기만이다. 자식의 미래는 현재 자신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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