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도심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흉물 그대로 남아 있다. 허물고 새로 지으려던 것을 시민들이 반대해 지금 모습으로 보존하고 있다. 전쟁의 참상을 전하고, 미래를 위한 성찰의 자리로 삼으려 한 것이다.
나는 불행했던 과거까지 역사적 자산으로 삼는 베를린 시민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수치스러운 시간을 피하지 않고 용기 있게 직시했다. 국가든 개인이든 지나간 시간엔 자부와 오욕이 섞여 있다. 오욕을 걷어내고 자부의 시간만을 엮어, 역사를 매끈한 동화로 만드는 것은 위험하다. 역사는 시간의 거대한 퇴적물이다. 우리는 이 장구한 시간 앞에 겸손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다시 친일 논쟁으로 뜨겁다. 이재명 지사가 최근 대선 출마 선언 직후 한 발언들이 불씨가 됐다. 이 지사는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지배 체제를 유지했다”고 한 말이 논란이 되자, 이를 재반박하면서 “여전히 우리 사회에 친일 매국 요소가 남아 사회 통합을 방해하고, 국민의힘 역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야당을 비난했다. 전형적인 친일 딱지 붙이기다. 민주당 열성 지지자들이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토착왜구라는 멸칭을 오랫동안 써온 어두운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역사를 해석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혐오와 배제의 감정을 담은 낙인찍기여선 안 된다. 이 지사의 친일 발언과 지지자들의 토착왜구 멸칭은 극성 보수층이 습관처럼 내뱉는 빨갱이라는 낙인과 다를 바 없다. 상대방을 뭉뚱그려 악마화하고 타자화하는 나쁜 언어다. 역사를 선악이 분명한 세계로 각색해 적개심을 부추길 때, 세계는 쉽게 폭력에 휩싸인다. 결국 우리 공동체가 연대해야 할 미래의 자리가 없어진다.
역사 해석은 미래를 위한 싸움이다. 앞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지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곳이 정신적 죽창가를 외치는 분열적이고 좁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유, 인권, 관용 같은 보편적 가치의 열린 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역사적 과제는 일본과, 거기에 부역한 친일에 대해 ‘적대의 시간’을 깨우는 게 아니라, 지난 시대의 폭력성을 반성해 가해자의 인간성이 온전히 회복되도록 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묻고 싶다. 그 폭력성과 식민성이 과연 우리에게는 없나? 우리는 지금 누군가의 존엄을 부정하고 억압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년 코로나19 초기 때 서울 대림동을 혐오 지역화한 것을 기억한다. 이는 우리 안에 있는 인종 차별적 전체성이다. 우리 사회의 최하위 노동 시장을 받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는가? 무시하고 차별하고 심지어 학대까지 하며 그들을 폭력적 위계로 대하고 있다.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 차별도 마찬가지다. 여성학자들은 오랫동안 남성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식민화의 결과로 보고 있다. 사회 최약자인 아동을 대상으로 한 신체·정신적 학대는 정상 가정에서도 늘 일어난다. 김희경은 자신의 책 ‘이상한 정상 가족’에서 “관계의 폭력이 용인되는 최후의 식민지, 거기에 아이들이 있다”고 했다.
약한 대상의 주체성을 박탈하고 억압하는 식민성은 지난 시대에 끝난 유산이 아니다. 지금 내 안에 있을 수도 있다. 토착왜구 딱지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혹시 전 시대 식민주의자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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