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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엘레지

입력
2021.07.21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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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인스턴트 라면의 효시 삼양라면. 1963년 발매 당시 1봉지 가격은 10원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내 인스턴트 라면의 효시 삼양라면. 1963년 발매 당시 1봉지 가격은 10원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인스턴트 라면이 한국에 등장한 1963년, 봉지당 가격은 10원이었다. 현재의 물가에 대입하면 400원 정도 된다. 2021년의 경제 수준에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음식 가격으로는 매우 싼 편이다. 하지만 당시 가격은 결코 싼 수준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인천에 있는 짜장면박물관에 의하면 60년대 짜장면 가격은 15원이었다고 한다. 봉지 라면이 짜장면과 맞먹는 가격이었던 셈이다. 인스턴트 라면의 원조인 일본 자료에도 초창기인 1958년도에 소매점에서 파는 우동사리 가격이 5엔 할 때 봉지 라면은 35엔이었다.

70년대를 살아온 내 기억에도 어머니는 라면을 먹일 때 돈 걱정을 하셨던 것 같다. 개별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조금 싼 ‘덕용(德用)’을 고르거나, 당시 메이저였던 라면 대신 2등, 3등 라면을 사셨다. 그걸 그대로 끓여주셨느냐, 그렇지도 않았다. 동네마다 작은 국수공장이 있던 시절이었는데 국수가 참 쌌다. 그 공장에서 마른 국수를 한 묶음 사서 라면에 섞어 삶아 양을 늘리기도 했다. 매끈하고 기름지며 꼬불꼬불한 라면 사이에 어색하게 섞여 있던 볼품없는 직선의 마른 국수라니. 물론 지금은 마른 국수가 더 고급 면이 되었지만.

라면은 꼭 양은냄비에 끓여 먹어야 맛있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 무렵엔 냄비가 거의 양은으로 대체되어버렸던 때였다. 얇으니 열 효율이 좋고(중동전쟁으로 무시무시한 기름 파동이 있던 때였다) 박박 닦아 쓰기도 편했다. 양은솥이 문명개화의 상징처럼 보이던 역사이기도 했다. 양은냄비 뚜껑에 라면을 덜어서 훌훌 불어가며 먹는 장면은 오랫동안 ‘궁핍 내지는 혼밥의 클리셰’로 수많은 문학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써먹기도 했다. 구로공단의 삶을 재현하는 공간이나 달동네 박물관 같은 곳에서도 어김없이 부엌의 찬장 대용 사과궤짝에 양은냄비가 놓여 있었다. 수출 역군이라 불리며 무지막지한 야근, 철야, 휴일근무로 숨 가쁘게 돌아가던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은 라면이나 겨우 끓여 먹으며 그 시대를 버티기도 했다.

며칠 전에 최첨단 디지털단지로 변모한 옛 구로공단 쪽을 걸어오는데 낡은 고가가 눈에 띄었다. 놀랍게도 다리 이름이 ‘수출의 다리’였다. 고가 뒤로 번쩍이며 서 있는 영어 이름을 가진 고층건물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여자들 머리카락을 끊어서 가발 만들어 수출하던 나라의 핵심 공단이 그곳이었다. 윤기 도는 머리채 판 값으로 아마도 우리 누이들은 라면을 끓여먹었을 것이다. 박정희 독재정권 몰락의 신호탄이었던 YH무역투쟁 사건의 그 회사도 가발 제조 수출회사였다.

라면은 우리 삶의 곳곳에 다채로운 모습으로 스며들어 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면서 제법 고급음식의 이미지에서 서민 생활의 어떤 촉수처럼 변해왔다. 건드리면 터지는 안테나 같은 것이었다. 라면 값이 별로 안 오른 이유는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라면은 시장이 가격을 정하는 자본주의의 보편적인 개념 밖의 일이 되었다. 어디 올리기만 해봐라 하는 시민들이 있고, 민심이란 걸 살펴봐야 하는 당국은 눈치를 보는 것 같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없는 세계에서 라면 회사들이 손해봤을 리는 없겠지만 라면 값이 이런저런 이유로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건 사실인가 보다. 값을 올리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라면 회사들의 호소가 기사에 나오는 걸 보니 말씀이다. 어쨌든 라면은 더 오랫동안 가장 싼 한 끼 음식의 대명사로 존재할 것이다.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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