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과에서도 페미니즘 얘기 못 꺼내. 남학생은 대놓고 싫다고 하고 여학생들도 분위기 싸하게 만든다고 뭐라고 하는걸.” 며칠 전 저녁식사를 하면서 대학생 딸이 한 얘기다. 이른바 백래시(Backlash) 얘기다.
백래시란 특정 이념, 사상에 대한 부정적, 집단적 반발을 뜻한다. 영어단어이니 우리만의 특별한 현상일 리는 없겠다. 세계 어디든 소수자, 소수민족, 흑인, 여성 등 과거의 약자가 사회적 평등과 정치, 경제 자결권을 회복하려 할 때마다 기득권자들은 ‘역차별’을 거론하며 반발했다. 미국에도 흑인을 겨냥한 '화이트 백래시'가 존재하고, 2017년 '#MeToo' 해시태그가 야기한 '미투백래시'도 유명하다. 그 무렵 우리도 “남자를 모두 잠재적 성범죄자로 여긴다”는 식의 백래시가 만만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백래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름에서 짐작하듯, 백래시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해당 사상이 어느 정도 사회적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1970년대 미국에서도 제2세대 페미니즘이 성과를 올리기 시작하자 백래시가 극성을 부리면서 공공연한 안티페미니스트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다. 하지만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했던가? 페미니즘보다 오히려 백래시에 대한 관심으로 페미니즘은 가시효과를 얻고 1990년 초반의 제3세대, 2010년대의 제4세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
백래시가 우리나라만의 특별한 현상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특이하지 않다는 의미도 아니다. 얼마 전 국민청원 게시판에 “페미니스트들이 조직적으로 학생들을 세뇌한다”며 처벌을 요구하는 청원이 올라와 수십만 명의 호응을 얻었다.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를 입었다고 게임 성우를 퇴출하고, GS의 행사 포스터가 '남혐'을 표현했다고 불매운동을 했다는 얘기는 특이한 차원을 넘어 솔직히 쪽팔리는 수준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의 백래시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과 반대를 넘어 사회전반적인 증오와 폭력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렇듯 소수의 일탈행위로 끝날 수 있는 일을 사회병리 현상으로 만든 데에는 정치권의 책임이 제일 크다. 야당의 젊은 남성정치인은 노골적으로 20~30대 남성의 백래시를 이용해 당대표에 당선되었고, 여당의 유력 여성정치인마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으니 말이다. 일탈의 목소리에 분명한 승리의 메시지를 안겨준 것이다.
미국의 페미니즘이 백래시를 극복하고 발전한 데에는 운동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아빠, 요즘은 과에서도 페미니즘 얘기 못 꺼내.” 난 딸의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본다. 페미니즘은 과거 약자들이 강압적으로 빼앗긴 언어와 목소리를 돌려주자는 운동이나, 우리는 그 반대로 아예 “또 한 번” 재갈을 물리려 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대의에 공감하고 호응하는 사람들까지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하고 얘기를 시작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으니 말이다. 페미니즘이 야기한 문제들에 불만을 얘기하고 반성을 요구하는 것과 아예 입을 틀어막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UNCTAD가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인정한 첫 해다.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이라지만 차별금지법은 시궁창에 내팽개쳐지고 페미니즘은 흉악범죄 취급을 당하고 있다. 이런 게 선진국의 모습일 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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