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와 더불어 생활한 지도 어느덧 1년 반이 지났다. 예정되었던 각종 행사와 공연, 예식과 잔치는 모두 연기되고 취소되었으며, 이 상황은 끝날 듯 끝날 듯 애를 태우며 여전히 우리를 한계까지 시험하고 있는 듯하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한 피해는 비단 경제적 손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배움과 일을 함께하며 미운 정 고운 정을 쌓을 수 있는 공간, ‘마당’을 잃었다. 아이들은 교실이 아닌 PC 모니터 속 선생님을 보며 짝도 모둠도 없이 외톨이가 되어 원격수업에 적응해야 했고, 직장인들은 이 상황에 살아남으려 집을 일터로 바꾸어가며 제 몫을 다해야 했다. 최근에는 기업들이 사업장이나 사무실의 규모를 축소하는 결정을 하게 되면서, 자신만의 불가침 영역인 책상이 없어졌다는 자조 섞인 사무직 종사자들의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코로나19가 원망스러운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지만, 무엇보다 사람들 사이를 섬처럼 고독하게 만든 것이 가장 큰 죄목일 것이다. ‘마당’을 잃은 우리는 저마다 외로운 섬이 되어 홀로 견뎌야 하는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만나고 싶은 이들을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헤어져야 하는 사람과 잘 이별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이러한 공간 상실의 예는 장례식장 장면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생로병사는 우리 인간의 필연적 조건 중 하나이므로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이 혼란스러운 팬데믹 상황에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지인의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그를 위로해야 할지 막막하고 당황스러웠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고심 끝에 어렵사리 조문을 가지만, 장례식장 분위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잔칫집인지 상갓집인지 헷갈리는 그 엄숙하면서도 묘하게 정겨운 분위기가 아니다. 유족의 슬픔을 함께 나누며 같이 눈물 흘리다가도, 평소 자주 만나지 못하던 선후배와 옛 동료들을 모처럼 한자리에 만나 시끌벅적 왁자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 우리의 장례식장 모습이었다. 그렇게 술과 음식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함께 추억을 나누는 것이, 고인과 영영 이별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이 쓸쓸하지 않을 수 있게 유족을 돕는 우리만의 오랜 관습이자 문화였는데, ‘마당’을 잃은 지금 우리는 상실의 아픔을 함께 나눌 만큼 가깝게 다가가지 못한다.
위로와 공감적 소통이 이루어지던 마당을 빼앗긴 채 필요한 정보만을 전달하며 지내고 있는 이 현실이 미래에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후유증은 언제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며, 훨씬 심각해지고 나서야 뒤늦게 알아차린다. 개개인에게는 심리적·정서적 상흔을 남길 것이고, 사회공동체에는 무형의 사회적·문화적 타격을 남길 것이다. 이런 상처를 지닌 우리는 1997년 이후 IMF 세대가 인구에 회자되듯이, 2020년을 기점으로 ‘팬데믹 세대’라 불리게 될 것이다. 모두가 수치로 추정 가능한 경제적 손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상이 더 위험한 법이다. 가면 뒤에 가려진 이 후유증은 개인만의 분투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기에, 지역사회와 정부 차원에서 예방적·선제적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앞으로 닥칠 그 어떤 새로운 어려움에도 대응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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