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남양유업의 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대리점 갑질 전력 위에 지난 4월 불가리스 효능 과장으로 뭇매를 맞았다. 홍원식 회장이 회사 매각 발표로 일단락 지었으나 최근 매각 계약을 파기, 주가가 급락했다. 6일에는 육아휴직에서 복귀한 팀장을 보직해임한 사실과 “강한 압박을 해 못 견디게 하라”는 홍 회장(추정)의 녹취록이 보도돼 다시 비판에 휩싸였다. 육아휴직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불법이라고 지적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분유 우유 치즈 등을 판매하는 회사라는 점에서 이런 모순이 없다.
□ 미국 최고의 속옷 브랜드로 통하던 빅토리아 시크릿도 위기가 깊었다. 깡마른 백인 소녀로 상징되는 전속 모델(앤젤)들에게 체중 감량을 강요해 악명이 높았고 회장과 임원의 모델 성추행이 폭로됐다. 쪼그라든 매출과 주가가 올해 반등한 데에는 몇몇 혁신이 있었다. 현실적인 몸매, 다양한 배경의 모델이 우선 눈에 띈다. 근본적 변화는 남자들의 환상 속 속옷이 아니라 여자들이 편히 입을 속옷으로 상품 전략을 바꾼 것이다. 이사진 다수가 여성으로 교체됐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 화장품 회사 아모레퍼시픽은 여성을 주 소비자층으로 삼아 여성 친화적 경영을 하는 대표적 기업으로 꼽힌다. 임직원의 약 70%가 여성인 이 회사는 서울 용산구 사옥에 산부인과 진료를 하는 병원, 어린이집, 수유실, 피트니스 센터를 갖추고 있고, 임신·출산 지원과 여성 리더십 계발에 적극적이다. 여전히 성별 임금 격차가 크다는 사실은 아쉽지만 소비자의 욕구 충족과 회사 경영 방식을 일치시킨 점이 돋보인다. 아모레퍼시픽이 글로벌 뷰티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토대일 것이다.
□ 빅토리아 시크릿은 ‘늙은 남자가 경영하는 젊은 여자 속옷 회사’라는 비아냥을 들었는데 남양유업은 ‘아이 키우기 싫어하는 분유 회사’로 낙인찍혀도 할 말이 없다. 육아휴직 후 돌아온 팀장 같은 수많은 아이 엄마들이 분유와 우유를 사 주어 존립한 기업이다. 출산율 높이기에 사활을 걸어야 할 판에 반(反)육아적 부당인사라니 단순한 오너 리스크가 아니다. 소비자를 배신하고 자기 존재 기반을 허무는 행위다. 깊은 위기의 뿌리가 드러난 듯하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