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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의 귀’와 진실의 힘

입력
2021.09.13 00: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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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 게티이미지뱅크

가짜뉴스. 게티이미지뱅크


1992년 3월 영국. 총선을 보름 앞두고 노동당은 이른바 ‘제니퍼의 귀’라는 정치광고를 지상파방송에 내보냈다. 중이염 수술을 받지 못해 고통을 겪고 있는 5세 소녀 제니퍼, 그리고 같은 병을 앓고 있지만 민간 의료기관에서 바로 수술해 완치된 다른 소녀를 대비적으로 극화해서 보수당 정권의 국가의료서비스(NHS)정책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그 파장은 매우 컸다.

노동당 당수 닐 키녹은 “여러분이 만약 보수당을 지지한다면, 더 이상 아파서는 안 된다”는 강성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상황은 곧 어처구니없이 역전됐다. 방송에 등장한 제니퍼가 실제가 아닌 가공인물이었음이 밝혀졌다. “키녹이 중이염을 앓은 소녀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면, 과연 다른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진실을 얘기했을까”라는 반론이 제기됐다. 선거의 결과는 보수당의 승리였다.

필자는 지난 칼럼(3월 8일자)에서 언론 자유는 곧 사회의 산소이며, 따라서 언론에 대한 징벌적 보상제가 인체의 산소 공급을 막는 치명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언론이 산소 같은 자유에 주어진 엄중한 책무성을 저버린다면 시민사회가 이를 퇴출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정치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1992년 영국 총선과 제니퍼, 그리고 키녹을 새삼 소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통령선거 정국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선거 때마다 찾아오는 음산한 느와르의 기운이 이번에도 예외없이 여의도 정치권을 감싸고 있다. ‘정치 공작’, ‘고발 사주’, ‘공익 제보’. 그 끝이 어디인지, 진실은 무엇인지 알지 못해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결국은 진실의 힘을 승리로 이끄는 역사의 신을 믿는다. 그러나 5년 동안 국정을 안심하고 맡길 대통령을 선출하는 소중한 시간을 정치 공작에 점유당하고 있는 현실은 참기 힘들다. 그 책임이 언론에도 있지만, 더 큰 책임은 정치인에게 있다.

미국의 팩트체킹 웹사이트 ‘폴리티팩트’는 주요 정치인과 각계 사회지도층의 발언, 그리고 다양한 온라인 공간에 등장하는 주장의 근거 사실에 대한 검증으로 명성을 쌓아, 2009년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난 14년간 의혹이 제기되어 폴리티팩트가 검증한 정치적 발언 7,639건 중 43%가 ‘대부분’ 혹은 ‘완전한’ 가짜뉴스였다. 또한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온라인 공간에 유통된 뉴스의 93%가 가짜뉴스였다. 미국의 정보와 뉴스 환경도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작은 위안일까.

미국이건, 영국이건, 한국이건 정치권의 가짜뉴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 국회 본회의 통과에 앞서 시간을 벌고 있는 언론중재법이 이 문제의 근본적인 처방이라는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언론의 문제는 언론 스스로 뼈를 깎는 자정 노력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아니면 퇴출이다. 백번 양보해 입법에 의한 해결이 불가피하다면, 정치인과 온라인 콘텐츠 제작자들에게도 징벌적 보상 책임을 물어야 한다. 가짜뉴스의 생태계를 고려할 때 당연한 문제제기다.

폴리티팩트의 책임자였고 현재는 듀크대학 석좌교수인 빌 아데어는 지난 2012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팩트체킹으로 가짜뉴스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정치인이 최소한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검증하고 있음을 알게 하고, 또한 시민이 뉴스 환경의 심각한 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는 데에 기여한다.” 하나의 입법과 팩트체킹 시스템이 진실의 힘을 작동하게 하리라는 주장은 오판이다. 진실의 힘은 성숙한 시민의식과 시민사회의 협력으로 비로소 기지개를 켠다.

마동훈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마동훈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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