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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정국을 강타한 ‘고발 사주’ 의혹 국면에서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갑자기 소환됐다. 박 원장이 제보자인 조성은씨를 개인적으로 만난 사실을 두고 야당에서 국정원 개입 의혹을 제기하면서다. 윤석열 예비후보 캠프는 박 원장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제3의 동석자까지 지목, ‘박지원 게이트’로 역공을 펴고 있다. 고발 사주 의혹으로 곤경에 처한 야당의 국면전환용 프레임이긴 하지만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이 정치 이슈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
□ 국정원의 국내 정치 관여는 법으로 금지돼 있다. 하지만 ‘정치 9단’이자 여의도 마당발로 통하는 박 원장이 취임하자 주변에서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박 원장도 이런 우려를 감안해 취임과 동시에 SNS를 포함한 모든 소통의 중단을 선언했으나, 이번 사태로 왕성한 대외 활동이 공개되고 말았다.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은 방송 인터뷰에서 “박 원장이 (조씨와 함께) 밥을 먹었다는 그 방에 친한 기자들은 다 불려갔다”면서 박 원장과 조씨의 만남을 일상적 대외 활동으로 두둔했다. 박 원장이 조씨를 만난 유명 호텔에는 국정원장이 외부 인사를 접촉하는 ‘안가’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 박 원장의 대외 활동은 김만복 전 국정원장의 행보를 연상시킨다. 김 전 원장은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인질로 잡혀있던 샘물교회 교인들을 석방시킨 뒤 귀국하는 길에 과감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동선의 기밀성을 내팽개친 그는 선글라스를 낀 정보 요원을 대동한 채 언론 앞에 나타나 국민을 놀라게 만들었다. 퇴임 이후 저서에서 10ㆍ4 남북정상회담 내용을 언급하는 바람에 국정원으로부터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 잔혹사로 불릴 만큼 역대 국정원장은 수난의 연속이었다. 국정원으로 명칭을 바꾼 국민의정부 이래 14명의 국정원장 가운데 11명이 퇴임 이후 검찰 수사를 받았다. 전신인 안기부로 거슬러 올라가면 뒤탈 없이 명예 퇴진한 수장이 없을 정도다. 박 원장의 경우 현재까지 드러난 바로는 정치공작을 단정하기 어렵다. 서훈 전 원장에 이어 명예롭게 퇴진한다면 이번 정부에서는 국정원장 수난사의 대를 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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