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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조선 말 나라를 망친 대표적 기강 해이 현상으로 조세제도인 ‘삼정’의 문란상이 꼽힌다. 삼정이란 논·밭에 물리는 토지세인 전정(田政), 군역 대신 군포를 징수하는 군정(軍政), 흉년이나 춘궁기에 나라에서 곡식과 씨앗을 빌려주고 추수한 뒤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는 환정(還政·환곡) 등으로, 국가재정의 근간이었다. 거기서 가렴주구가 자행됐다. 일례로 군정에서는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가 횡행해 백성의 고혈을 짰다.
▦ 원래 군역 대신 군포를 징수한 건 백성을 돕자는 취지였다. 식량이라곤 농사로 거두는 쌀밖에 없던 상황에서 농사를 지을 가장이 군역에 나가기라도 하면 그해 농사는 포기해야 하고, 자칫 식구들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군역 대신 베로 세를 내도록 봐준 건데, 수령과 아전들이 호적을 조작해 농가에 이미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를 매겨 수탈했으니, 나라가 뿌리째 흔들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 자고로 국가경영은 정확한 잣대로 실태를 엄정히 파악하는 게 핵심으로 여겨졌다. 공자가 ‘논어’에서 3,000년 전 주나라를 세운 무왕을 칭송하면서 첫 구절에 도량형을 엄밀히 정하고, 법률을 명확히 했다는 뜻인 ‘근권량 심법도(謹權量 審法度)’를 내세운 것만 봐도 그렇다. 치수를 재는 자(尺)가 고대 이래 제왕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신라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태조의 금척(金尺) 설화가 이어지는 것도 국가경영에서 엄정한 계량과 실태 파악의 중요성을 웅변한다.
▦ 그럼에도 선진 문명국을 자부하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잘못된 정부 통계와 아전인수식 해석이 횡행하는 한심한 상황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 정부 들어 큰 물의를 빚은 사례만도 집값 상승 통계부터 소득격차 실태 통계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급기야 최근엔 전국의 공공 취업상담사들이 2017년부터 집단적으로 노령 사망자 1만3,000여 명을 구직신청자나 취업자로 둔갑시키는 ‘백골취업’으로 실적을 부풀린 사실이 드러났다. 더 가관인 건 정부가 진작에 이를 파악하고도 감췄다니, 대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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