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기술혁신 수준과 방향은 무엇에 의해 결정될까? 이제까지 혁신연구는 기술혁신을 주로 국내 제도와 정책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해 왔다. 그러나 최근 경제 및 안보 위협이라는 외부 세계정치·경제 요인이 기술혁신을 이끄는 주요 요인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기술혁신 과정과 결과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고 배분적 효과를 가지기 때문에 기술혁신 예산이나 정책에 대해 국내적 지지나 저항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경제·안보 위협 및 이에 대한 인식이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경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혁신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합의가 비교적 용이하게 이루어지고 적극적인 투자가 진행된다. 외부 위협 자체가 기술혁신을 직접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인식이 중요한 것이다. 반대로 외부 위협에 대한 인식이 강하지 않아 기술혁신에 대한 국내적 논란이나 저항이 더 두드러지는 경우 기술혁신에 자원이 집중되기 어렵다.
예컨대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했을 때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이 엄청난 예산을 투자하여 NASA를 설립할 수 있었다. 평상시였다면 NASA와 같은 대규모 연구기관을 만드는데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겠지만 미국 내에서 소련의 위협에 대한 인식 공유로 우주 기술혁신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가 형성되었다. 테일러라는 정치학자는 이러한 상황을 '창조적 불안정(creative insecurity)'이라고 불렀고 국가의 기술혁신 양상은 외부 위협에 대한 인식과 국내 저항의 균형 속에서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외부 경제 및 안보 위협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높았던 이스라엘, 한국, 대만 등에서 기술혁신에 대한 국내 저항을 견제하며 비교적 높은 기술혁신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음을 사례로 언급하였다.
바야흐로 세계는 다시 한번 창조적 불안정의 시기로 진입하고 있는 듯하다. 미국은 중국의 기술 굴기를 견제하기 위해 기초과학, 반도체, 통신, 이공계 인력양성 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자국 기술혁신 역량을 제고하고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유지하기 위한 패키지법안 '혁신경쟁법(USICA)'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은 '14차 5개년규획(2021~2025)' 등을 통해 혁신이 이끄는 발전과 기술자립을 국가전략의 핵심 내용으로 강조하며 지원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국가 핵심전략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특별법안 등 지원 방안이 논의 중이다. 각국에서 논의 중인 다양한 법안과 지원 정책들이 어떻게 현실화되고 실제로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인지가 향후 세계정치·경제의 향배에 매우 중요하다.
현재 한국 기술혁신 전략에 대한 논의는 그 강도와 규모에서 미국과 중국의 절박함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위협에 대한 인식이 낮기 때문일까? 국내저항이 크기 때문일까? 아마도 기술혁신과 외교 전략이 서로 충분히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반도체 산업의 사례에서 잘 드러나듯 기술은 한국의 세계정치·경제 위상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술혁신은 한국 외교전략의 핵심적인 부분이 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을 위시한 신기술의 부상과 미중 패권경쟁이라는 창조적 불안정 상황에서 기술혁신과 외교가 상호 침투하여 결합된 국가전략 모색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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