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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게 가장 중한 것

입력
2021.10.22 22:0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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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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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은 때로 엉뚱한 곳에서 시작돼 삶의 길모퉁이에 보석처럼 박히기도 한다.

새로 나온 책 관련 홍보자료를 만드는 데 정신이 팔려 점심시간을 놓쳐버렸다. 돌연 쌀쌀해진 날에 끼니때마저 지나고 보니 뜨끈한 음식이 몹시 그리웠다. 그렇다고 얼큰한 국물 음식을 혼자 먹기는 부담스러워, 시장 안의 칼국숫집으로 털래털래 걸어갔다.

오후 2시 넘은 시간임에도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대기 줄에 선 채 스마트폰을 검색하고 있는데, 누군가 불렀다. "점심이 늦었네. 이리 와요, 오늘도 나하고 같이 먹으면 되겠어." 시장 초입에서 해산물 가게를 하는 아주머니가 저쪽 테이블에서 나를 불렀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마주 앉아 칼국수를 먹게 됐다.

2년 전 그때도 나는 혼자 이곳 대기 줄에 서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가게 직원은 앞뒤로 혼자였던 나와 아주머니에게 일인용 바 대신 테이블에 합석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둘 다 눈웃음을 지으며 동의했던 걸로 기억한다. 착한 가격에 맛까지 훌륭한 음식점들이 대개 그렇듯, 이곳에서는 물과 반찬을 각자 챙겨야 한다. 자리를 안내받은 후 정수기에서 물 두 잔을 받아다 테이블 위에 놓았다. 습관처럼 김치와 다른 반찬들을 가득 퍼담아 식탁에 놓으며 불편하시지 않으면 함께 드시자고 했다. 그게 좋으셨던 듯하다. 국수를 먹다가 눈이 마주치면 그이가 환하게 웃었다. 나로서는 모르는 어떤 이가 따스하게 웃어주는 것만으로 좋아서 국수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고향에서 파를 한아름 들고 왔던 날, 해물파전을 부쳐 먹고 싶어 해물전에 갔다. 낯익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던 순간, 그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얼마 전 칼국숫집에서 합석했던 분이 이 가게의 주인이었던 거다. 세상인심이란 게 종종 이래도 되나 싶게 후하다. 가게 주인으로 다시 만난 그이는 오징어와 조개류를 산 내 장바구니에 실한 홍합 한 바가지를 찔러넣으셨다. 그렇게 나는 가게의 단골이 되었고, 뭐라도 챙겨주려는 사장님의 마음이 부담스러워 그이가 자리를 비운 틈을 공략하기도 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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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잖아도 가게에 들르려고 했어요. 저녁때 나이 어린 손님 두 명이 오는데, 자기들이 도착하자마자 먹을 수 있도록 시원한 꽃게탕을 끓여놓으라고 협박하는 거예요." "오늘 꽃게가 아주 좋아. 맛없다고 타박 들을 걱정은 없을 거야." 식사를 마친 우리는 나란히 해산물 가게로 향했다. 사장님이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사이, 점원을 불러 꽃게 네 마리와 전복 여섯 마리 값을 치른 나는 후다닥 돌아섰다. 대로변으로 나와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그이가 내 어깨를 잡았다. "이 새우들을 넣어야 흉잡히지 않을 꽃게탕이 완성되는 거야. 암 소리 말고 얼른 가져가." 검은 봉지를 내 손에 쥐여준 그이가 돌아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과 봉지 안에서 팔딱이는 대하 다섯 마리를 번갈아 보았다.

이런 인연 덕이었다. 분분한 고함들이 죄다 싫은 날, 이만큼 살고도 외면하고 싶은 것들투성이라 슬퍼지는 날, 이렇게 우연한 만남과 온기마저 없다면 사는 건 얼마나 쓸쓸하고 무가치하게 여겨졌을까. 횡단보도를 건너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할 일은 꽃게탕을 맛있게 끓이는 것이다. 푸짐한 저녁상으로 귀한 친구들을 기쁘게 하는 것, 이보다 중한 게 대관절 무엇이겠냐고 말이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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