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6개월 뒤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공적만큼 우뚝한 것이 안중근 일가의 독립운동에 대한 헌신이다. 안 의사보다 다섯 살 아래 동생 정근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고 열 살 터울 공근은 김구의 오른팔이 되어 한인애국단 운영을 도맡았다. 105인 사건으로 15년 옥살이한 명근, 항일무장활동에 앞장섰던 경근 등 사촌은 물론 조카도 여럿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있었다.
□ 안중근 일가는 이렇게 40여 명이 독립운동에 나서 15명이 건국공로자로 서훈받았다. 보훈처가 인정한 약 1만7,000명 독립운동가 중 막대한 재산을 처분해 6형제 모두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이회영 일가에 비견될 공적이다. 심신의 고달픔과 두려움은 물론 죽음마저 넘어서는 이런 집단 헌신이 어떻게 가능할까.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라고 했다는 안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같은 담대함과 기개도 동력의 하나일 것이다.
□ 하지만 그런 헌신에 대한 국가의 보답은 어이없는 것이었다. 안 의사의 사촌동생 경근은 광복 후 귀국해 김구를 도왔고 4·19 직후 조카 민생과 함께 통일운동에 앞장섰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5·16 쿠데타 세력의 '반역 행위'라는 사법적 낙인과 투옥이었다. 민생은 훗날 "독립된 내 조국에 돌아와서 또 감옥살이를 치러 우리 안씨 가문은 이역과 조국에서 선후대에 걸쳐 50여 년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고 한탄했다.
□ 안 의사 동생 정근의 며느리인 박태정 여사가 23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인 안진생씨는 여러 나라 대사를 지낸 외교관이었으나 전두환 정권에서 해임된 뒤 충격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고 이후 가세가 기울어 극빈의 생활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월세를 전전하다 15평 임대주택에서 두 딸 등과 근근이 사는지라 삼일장 치를 여유도 없어 당일 바로 발인을 하고 말았다. 독립운동가와 유족에 대한 대우가 소홀하다는 지적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얼마나 개선됐는지 의문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