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대한 오래된 농담이 있다. 인스타는 '내가 이렇게 잘 먹는다'를 보여주기 위해, 네이버 블로그는 '내가 이렇게 전문적이다'를 과시하기 위해, 카카오스토리는 '내 아이가 이렇게 잘 큰다'를 자랑하기 위해 쓰인다는 농담이다. 이제 SNS의 특징도 꽤 바뀐 것 같다. 페이스북은 '내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식견이 있다'를 보여주기 위해, 트위터는 '내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를 내세우기 위해 쓰는 것 같다. 페이스북에는 정치적 이슈에 대한 의견과 정치인에 대한 조언을 한 편의 논문 분량으로 아낌없이 쏟는 중년의 제갈공명들이 많고, 트위터에는 정치적 사안의 핵심을 150자 안에 벌처럼 쏘아버리는 무하마드 알리들이 많다.
우리나라 대선 후보들도 SNS 이용에 열심이다. 윤석열 후보는 지난 14일 페이스북에 '주적은 북한'이라는 다섯 글자의 메시지를 올렸다. 지난 7일에는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를 게시했다. 자세한 내용이나 추가적 메시지는 없었다. 한 편의 논문도 너끈히 올릴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공간을 제공하는 페이스북의 기능이 무색했다. 대선 후보가 자신의 주요 공약을 일곱 글자의 SNS 업로드를 통해 갑작스럽게 바꾸면서(그는 경선과정에서 양성평등가족부를 만들 것이라 말했다) 이에 대해 추가적 해명조차 하지 않는 일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한 나라의 대선 후보가 그럴 리 없다. 혹시 그사이에 페이스북에 트위터처럼 글자 수 제한이라도 생긴 걸까? 그는 어쩔 수 없이 일곱 글자 사이에 자신의 의견을 욱여넣어야 했던 걸까?
많은 이들이 이것이 성별 갈라치기를 통한 분열의 정치라는 점을 지적하며 비판에 나섰다. 그러나 내가 놀랐던 점은 그의 분열의 정치가 놀랍도록 성의가 없었다는 부분이다. 그가 남긴 것은 일곱 글자였다. 그가 주적으로 삼는 북한조차 선동적 구호를 위해 고심한다. 이는 그가 대상으로 한 여성에 대한 무성의라기보다는, 그가 표를 얻고자 한 이삼십 대 남성에 대한 무시에 가깝다. 마음 떠난 연인을 붙잡기 위해서조차 한 장의 편지가 필요한 것을, 그에게 돌아선 청년들의 마음을 일곱 글자로 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걸까? 그는 청년 남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걸까?
정보가 범람하여 모두가 짧은 요약을 바라는 시대다. 이라영 작가는 '타락한 저항'에서 읽기의 경제성을 위한 요약이 어떻게 정보의 왜곡이 되는지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단편적 정보는 많고 유명인의 생각은 확대재생산된다. 전체적 흐름과 맥락은 쉽게 요약되고 때로는 왜곡된 정보가 점점 부풀려지기도 한다.
이라영 작가 '타락한 저항'
정보를 대량으로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진짜 정보를 감추는 일, 그리하여 일차원적 사유로 유권자를 우민화하는 일은 21세기적 정치 기만이다. 긴 글은 쉽게 호도되고 왜곡된다. 그러나 페이스북에 남긴 일곱 글자의 정책은 너무나 간단하고 명료하여 왜곡할 정보도, 감출 여지도 없다. 나는 21세기적 정치 기만에서조차 소외된 듯하다. 성의 없는 기만에 마음이 상한다.
자세한 설명도, 추가적 해명도, 다른 해석의 여지도 없이 간명한 메시지만을 툭 던지는 정치인을 나는 한 명 더 알고 있다. 그가 11년간 올린 트윗은 4만 개가 넘는다. 그는 트위터로 '지구온난화는 사기', '(미국의) 우편투표 시스템은 사기'라고 했다. 그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지금, 미국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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