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끔하게 차려 입은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어느 나라에서 왔냐?"며 말을 건넸다. 순간 경계 태세 발동이다. 여행 초보일 때는 해맑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만, 이런 대화가 요상한 호객이나 관광객 대상 사기로 이어지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면 적당히 친절하지만 냉랭한 말투로 답하게 된다. 영어로 말 거는 이들은 사기꾼 아니면 호객꾼이라는 선입견도 생겼다.
갓 배운 영어를 한 번 써보고 싶어서 어눌하게 말을 거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정작 내 답변에는 관심이 없었다. 동북아시아 어디라는데,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남쪽이라고? 그게 진짜 궁금한 건 아니니 말이다. 한데 이 신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듣더니, "정말 멀리서 왔네, 웰컴 투 시리아!" 라며 환하게 웃더니 갈 길을 갔다. 그저 진심 어린 환영인사를 하고 싶었던 게다.
친구가 하는 좋은 식당이 있다든가, 하다못해 기념품가게라도 소개할 줄 알았는데, 총총히 사라지는 그 뒷모습이 신선했다. 나 역시 장기여행자라는 오만함과 매너리즘에 빠져있었구나 깨닫게 해준 12년 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의 짧은 만남. 그날 이후 나에게 시리아는 그가 남기고 간 상쾌하고 따뜻한 비누 향이었다.
다시 시리아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건 터키에서였다. 유창한 프랑스어로 박물관의 유물을 설명해주고 유난히도 씻고 단장하길 좋아하던 그 사람들이 더러운 이불을 덮고 거리에 앉아 있었다. 2011년 독재정권을 몰아내자며 퍼졌던 '아랍의 봄'은 기나긴 시리아 내전으로 이어졌고, 어느새 시리아라는 이름은 IS 본거지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다.
가끔은 검문을 당하고 잡혀가는 이들도 보았다. 시리아에서 보낸 긴 시간 동안 그들이 베풀었던 환대를 생각해보면, 두려워하는 눈망울을 마주칠 때마다 울컥 눈물이 났다. 바다를 통해 밀입국을 하려다가 익사한 채 해변으로 떠밀려 온 3살짜리 꼬마사진도 세계에 큰 충격을 줬지만 곧 잊혀졌다. 그들은 이웃한 많은 나라의 골칫덩이가 되었고 국경을 높이는 이유가 되었다. 내 발등의 불이 먼저라 코로나에 부대끼며 잊고 사는 동안 여전히 시리아 내전의 고통은 진행형이다.
그 내전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아버지가 신경가스 공격 때문에 팔다리 없이 태어난 어린 아들을 안아 올리며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시에나 국제사진전에서 올해의 사진으로 꼽힌 시리아 난민촌의 풍경 '삶의 고단함'이다. 고된 삶일수록 튼튼한 팔다리가 유일한 자산일 텐데, 이 부자가 가진 팔다리는 모두 합해 고작 3개다.
다행스럽게도, 이 가족이 난민자격을 인정받고 이탈리아 시에나에 정착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이제 어린 무스타파에게도 인공 팔다리가 생길 수 있다는 희망이 찾아왔다. 시리아 난민가족의 사정을 온 세상에 알리고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시에나는 14세기에 흑사병이 돌 때 인구 3분의 1이 죽어나가는 고통을 겪은 작은 도시다. 그럼에도 희망이 전문인지, 코로나19 때문에 통행금지가 되었을 땐 집에 갇힌 서로를 위로하며 "우리 지지 말자"는 노래가 발코니를 통해 밤마다 울려 퍼졌다. 그 발코니마다 내걸렸던 '모두 괜찮을 거야 Andrà Tutto Bene'라는 문구가 부디 무스타파의 가족에게도 진짜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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