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부터 강의할 때 당황스러웠던 부분은 학생들에게 사례를 들어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예전엔 적어도 특정 세대의 대부분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학, 예술, 사건, 대상 혹은 심지어 그에 대한 관점과 가치관이 있었는데 이제는 가치관의 문제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사건 자체가 공동의 경험 바깥에 있는 경우가 많다.
며칠 전에는 형법 강의를 하던 중에 경찰이나 공권력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물리력을 행사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자력구제'를 설명하기 위해 배트맨의 사례를 들어 학생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학생이 '배트맨'이 뭔지 모른다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몇 명에게 물어도 같은 대답이 나와서 당황한 나머지 강의를 듣는 학생들 모두에게 배트맨을 아냐고 물었더니 배트맨을 아예 모르는 학생도 상당수고, 이름은 들어봤지만 한번도 영화를 본적이 없다는 학생은 절반이 넘었다.
사실 이런 일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삼총사, 서유기, 삼국지, 레미제라블을 예로 드는 걸 포기한 지는 오래됐다. 달타냥이 누군지도 모르고, 유비 관우 장비도 겨우 이름만 알거나, 손권까지 가면 '어느 과 교수님이신가요'가 된다. '레미제라블'은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님의 은촛대를 훔친 소설 초반부만 아동용 도서로 접한 학생들이 많다가, 이제는 장발장이라는 이름조차도 모르는 학생들이 허다하다.
예전에는 이런 현상을 세대 차이 혹은 책을 잘 읽지 않는 아이들의 교양 부족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의 현상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회지형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너 개의 공중파 방송이 매체의 전부였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아이들과 "야, 너 어제 그거 봤어?"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요즘은 지상파에 케이블 TV 채널도 무수히 많은 데다 유튜브를 비롯한 인터넷 매체, 각종 OTT 서비스까지 난립하고 있어 비슷한 화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쉽지 않다. 즉, 동일한 세대 내에서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이다.
민주 사회에서 다양성의 증가는 언제나 두 손을 들어 반겨야 하는 현상이라고 배워 왔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로 자유롭게 의견을 내놓는 가운데, 창의적 사고도 가능해지고 더 나은 의사결정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다양성의 가치는 어떤 경우에도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한 공동체의 존립조건은 구성원들 간의 최소한의 공감대가 아닐까. 예전 선배 교수님들은 나이가 들면 세대의 변화를 못따라가서 은퇴를 고려하게 된다고 하셨는데, 요즘은 아예 '일반론'으로서 학문, 토론, 합의의 기반 자체가 사라지고 취향과 사고, 가치관 등이 모두 파편화되는 근본적인 시대적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꽤 오랫동안 교육의 영역에서도 다양성의 확대는 주요한 화두였다. 하지만 사회의 다양성과 분화로 인한 의견의 양극화와 대립이 뚜렷해지는 세태를 보며 사회적 공감대의 기반으로서 교육이 갖는 역할에 대해서도 주목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 오히려 사회적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영향 혹은 상처는 날이 갈수록 더욱더 커져 가리라는 사실은 분명한데 과연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것은 언제까지 가능한 일일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